본문 바로가기

커버스토리/생로병사

폭력적 ‘입문식’과 어른에 대한 상념들: 물어지지 않는 물음을 찾아서_심형준



불안과 분노, 그리고 ‘없는 물음’


박사학위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학위를 마치기까지 유예되었던 많은 것들의 만기가 도래했다.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갚을 길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위로를 삼아 보지만, 인간의 도리, 사회인의 도리, 자식 된 도리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비교와 평가에서 쉬이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창작의 고통’을 핑계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실상은 뿌리 깊은 불안 탓이 크다.


불혹이 코앞이다. 이립(而立)을 완수하지 못한 삶에서 불혹(不惑)은 언감생심이다. 20대부터 이어지고 있는 불안(不安)이 있을 뿐이다. 불안은 여유를 잠식하고, 쉬이 분노케 한다. 20년 가까이 쌓인 불안은 내게 분노조절장애를 선물했다. 그리고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버렸다. 위의 꼰대를 욕하며 아래로 꼰대 짓을 일삼는다. 밖에서 혁신과 평등 그리고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안에서는 압제와 폭력의 화신이 된다.


나는 ‘바른’ 혹은 ‘정상적인’ 어른으로 크지 못했다. 불혹이 눈앞이지만 이립조차 버거우니 말이다. 이런 자의식 탓에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종종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 불을 지핀 이야기가 있었다. 소위 ‘요즘 아이들 문제’라는 내용으로 대학교 신입생들의 '폭력적 신고식’을 고발하는 기사들이다(기사1, 기사2, 기사3). 


그 신고식에는 폭음, 얼차려, 기타 가혹행위 등이 동반되었다. 분명 그러한 폭력적 신고식은 ‘나쁜’ 것이다. 신입생들에게 그러한 일을 시키는 선배들이 ‘나쁘다.’ 이러한 인식까지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뭔가 빠져있다. 중요한 질문이. 그 선배라는 친구들이 저런 짓을 왜,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묻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체 저런 짓을 어디서 배운 것인가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



군사문화? 조폭문화? 위계질서와 감춰진 수혜자


이런 기사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신입생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가혹행위가 동반된 신고식으로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된 것에는 특히 체육학과의 사례가 많았다.[각주:1] 최근 기사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원인론이 과거 기사들에서는 제법 제시되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원인론(기원론)은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것이다(거슬러 올라가서 일본식 군대 문화의 잔재라고 하기도). 이러한 기원론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가혹한 신고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옷을 벗기고, 추위나 폭염에 노출시키고, 폭음이나 폭식을 시키고, 오물을 먹이기도 하며, 약한 동물 죽이기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혹한 신고식이 이루어지는 조직이 위계질서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계급을 두고 있는 위계 조직인 군이 그러한 문화의 원천이라는 지적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참여정부 때 병영문화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기원론이 군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해석되었다.[각주:2] 그리고 등장한 것이 ‘조폭문화’ 기원론이었다. 이는 해당 체대 학생들의 폭력적 신고식이 군의 유격훈련장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반론권 없는 ‘악당들’의 문화를 그 기원으로 지목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들은 폭력적 신고식을 그와 유사한, 그러면서도 가장 ‘나쁜’ 형태라고 생각되는 행태와 연관 짓는 방식의 내러티브다.


그러나 비슷한 것이 원인(혹은 기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떤 기사들은 대학과 사회의 위계질서를 이야기한다. 대학 내 위계에서 최상층에 있는 교수는 왜 ‘나쁜 선배’들의 행동을 막지 못하는지, 혹시 위계질서에 기초한 유대가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러한 신고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등을 묻는 것이다. “이런 신고식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가?”



위계질서의 현실감각 그리고 폭력적 구조와 불안


감추어진 수혜자를 폭로한다고 해서 ‘폭력적 신고식’의 원인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은폐되어 있는 ‘더 욕을 먹어 마땅한 존재’를 상기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말이다. 입문식, 신고식, 무엇으로 불리든지 그것이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의례적 과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의례적 과정을 통해서 참여자가 얻게 될 가치는 무엇인가? 


현실 사회를 모사하는 위계질서에 대한 학습과 순응이 군대문화, 조폭문화를 들먹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 감각’ 때문일 것이다. 조직문화, 위계질서를 익히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그것이 사회 현실이라는 이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뭣 같아도 순응할 수 있어야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를 아마 한 번은 들어 봤을 것이다. 나처럼 잘 참지 못하는 족속들은 이런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란다. 위계적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사회에서 도태되고 배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알고 있는 부모, 스승, 선배, 그리고 그것을 민감하게 포착해 낸 동료들이 ‘친절하게’(?) 알려 준다. 그래서 ‘폭력적 신고식’의 원인으로 지금 사회 구조의 내적 폭력성을 지목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내적 폭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한 스케치를 해 보자. 저성장 사회로 진입한 한국,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고, 가계 소득은 정체된 반면 기업 소득은 증가하고 있다. 빈부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양극화 사회가 아닌 1:99의 사회가 이야기되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불안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실직의 위험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혼 인구가 증가하고, 아이를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 경우가 늘어 낮은 출생률이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되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지속 가능성’에 의문부호가 붙여져 있다.


높은 실업률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당한 노동 환경에 눈감게 했다. 개개인을 옥죄어 오는 소득/직업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자 쥐어짜기, 갑의 횡포인 밀어내기, 낮은 최저임금, 사회 안전망 없는 노동 유연화, 경제인의 사면, 친자본 경제정책, 복지 축소, 선별 복지 패러다임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구조이자 질서로 체념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상상계에서의 개정rectification 욕구는 높였다.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사회 변혁의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소비되었다.


불안에 대한 체념은 ‘헬조선’, ‘지옥불반도’, ‘n포세대’, ‘흙수저’, ‘노오력’이란 말을 탄생시켰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은 이제 순간순간의 특별한 가치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닌 ‘희망고문일 수밖에 없는 미래’에 대한 자포자기를 선언하는 언어가 되었다. 지금의 20-30대 젊은이들은 이런 현실의식을 내면화하면서 어른이 되길 강요당하고 있다.



배양액 속 아이들


자, 20-30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또 어떻게 키워졌던가. 아이들은 윗세대의 ‘친절한 조언’을 듣기보다는 불안에 짓눌린 부모들에 의해서 ‘무한 경쟁의 장’에 던져졌다. 거기서는 성공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들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아이들은 한 눈 팔지 않고 그 단계의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야 했다.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그런 구조에서 증폭되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교생활의 주요한 문제는 자살, 왕따, 학교 폭력 등이 되었다. 그런 문제에 경찰이 개입해서 해결하겠다는 편리한 후속조치는 ‘폭력적 신고식’에 대한 대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바 있다. 아이들은 양육되는 게 아니라 배양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못 받는 ‘나이 어린’ 사람이 어디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간 대접을 하는 방법을 배우겠는가? 아이들은 귀신 같이 약자를 찾아내서 놀리고 괴롭히고 때리고 돈을 빼앗는다. 그 ‘폭력적’ 아이들이 특별히 ‘나쁜’ 아이라서가 아니다. 그 아이도 위로부터 짓밟히고 짓눌리고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다. 폭력적 구조는 계속 약자를 찾아 폭력이 집중되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런 구조 하에서 ‘차별 철폐’를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것인가.


약하기에 짓밟혀 왔던 경험은 그대로 약자는 ‘짓밟혀도 된다’는 생각을 정당화하기 쉽다. 그리고 아이들은 약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폭력적 구조에 순응하는 경험을 일찍부터 학습해 온다. 힘 센(물리적이든 물질적이든) 아이의 부조리한 행위가 ‘우리’와 ‘약자 한 녀석’을 구분 지을 때, 아이들은 종종 기꺼이 ‘힘 센 아이’의 옆에 선다. 또래에서 배척될 때, 폭력적 구조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민감하게 눈치 채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납득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적 신고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또래 집단의 따돌림, 배척을 감수하고?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듣게 될 소리는 뻔하다. “모난 녀석은 정을 맞게 되어 있다.” 시쳇말로 ‘관종’ 취급을 받을 것이다.[각주:3]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누군가 하나 손해를 각오하고 저항하지 않는다고 책임을 추궁하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아이들의 미러링 대상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 이 땅의 어른들은 불의에 저항하고 상식과 원칙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공무원이 정부에 입바른 소리 했다가 고초를 겪었다는 사례는 너무 많다. 4대강의 문제를 제기했다가 불이익을 받은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원, 승마회의 부정 심사 문제를 원칙적으로 처리하다가 ‘나쁜 사람’이 되어 사직해야 했던 공무원 등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최근에 이런 기사도 보았다. “23명의 죽음을 막지 못한 한국 공무원”에 대한 이야기다(관련기사). ‘막지 못한’ 이유는 해당 공무원이 자신의 업무에서 밀려나서다. 그 죽음의 책임은 다른 공무원들에게 있었다. 그 비극적 사건이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건’이다.


기사의 주인공은 화성시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었다. 당시 해당 시설의 허가는 유아청소년 시설관리를 담당했던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는 그 시설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건 상사의 압력, 민원인의 회유와 협박이었다. 그는 결국 전보되었고, 새로운 담당자가 이를 허가했으며, 결국 참사가 벌어졌다. 사건 이후 그가 경찰에 제출한 비망록으로 인해 동료들이 구속되면서 그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 이후 그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없다.


세월호 때도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가 죽은 선생님들에 대한 예우가 문제시되고 있으며, 아이들을 구하다 살아남은 생존자는 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치료비조차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사고 이후 희생자들을 수습했던 잠수사들은 또 어떤가("뼈 썩어가고 트라우마에 생활고"). 사회는 그들이 받아야 마땅한 찬사와 예우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도.[각주:4] 반면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 중에서 그 책임을 다한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책임회피, 은폐는 쉽게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한 해경 경비정의 지휘관에게만 사법적 책임을 묻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사회에서 펜을 굴리는 사람 중에 누가 떳떳하게 아이들의 부조리에 일갈할 수 있겠는가. 어두운 현실에 답답한 한숨을 몰아쉬는 것 밖에는 할게 없다. 아니 펜으로 써 내려가는 글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란 걸 가지고 있다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글을 먼저 쓰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무기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른들이 어떻게 책임을 지고 세상을 바꿀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할 것인지 이야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음에도 위계를 내세우고 부당한 폭력을 가하고 있다면, 따끔한 회초리로서의 펜의 비판이 빛을 발할 것이다.


분노조절장애 탓에 이야기가 다소 엇나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노의 결을 따라 가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분노가, 그래서 가질 수밖에 없는 자기반성이 현실 부정의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현실을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신화적 역사’ 속으로


‘세계는 온갖 부조리,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역사는 역행하고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나도 그러한 시각을 공유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역사가 뒤틀려 있다는 생각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요청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바로 그 뒤틀린 역사에서 나온 게 아닌지 ‘상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반칙해도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가 대대로 떵떵거리고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반칙을 하며 산다는 생각, 줄만 잘 대면 ‘안 되면 되게 하라’의 정신이 통한다는 생각, 동향이고 친척이고 동문이면 프리패스라는 생각 등등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반공시대, 군부독재 시대에 뒤틀린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간 여행을 조금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유교적 허례허식의 폐단, 붕당정치의 폐해, 세도정치의 폐해, 쇄국정책의 폐해를 들먹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소위 ‘어른’이라 자임하는 인간들이 수백 년 동안 해 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기성세대의 권위를 부정해 버린다. 그러나 오로지 역사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서만 말이다. 현실 속에서 그 권위를 전복할 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충분히 사실에 기초해 있다고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특성을 갖는다.[각주:5] 


현실은 그릇된 지배세력의 세계이고, 악하고 무도한 세계이다. 이 세계가 악한 것은 과거에 부당하게 부와 권력을 획득한 지배세력이 아직까지도 그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당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칙을 일삼고 있는 한 우리 사회에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초인'이 나타나 이 부조리를 혁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라는 이해인 것이다. 변화의 열망은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의 출현을 통해서 일거에 달성될 수 있다는 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몇 차례의 선거에서 그러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자조적 현실 인식은 더욱 강화된 것 같다. 이미 이 현실은 ‘지옥’이다.[각주:6] 새로운 세계의 등장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들보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 이런 세상은 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든 저렇든 나 하나 잘 살기도 바쁜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고되는 역사를 어쩌면 ‘신화적 역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는 팩트 그 자체로 눈에 보이는 사물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유물, 유적, 전적 등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의 독특한 ‘관점’에 따른 해석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니 말 그대로의 ‘역사’는 없다. 여러 신화적 역사들 중에서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감각’도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동반한다. ‘한국 지옥론’은 그러한 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성인이 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맥락 위에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단순하게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전이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환경적 조건과 그것에 대해 만들어지고 잘 유포된 각종 이야기들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상호 조직하는 과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 되기’와 폭력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하게 성인식을 거쳤다는 혹은 법적 성인이 된다는 문제와는 또 다른 것이다.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는 것은 분명 법적 수준에서 완료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특정한 ‘자격’을 부여해 줄지언정,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성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거기에서 입문식이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입문식 이후에도 성과를 통해서 인정을 받는 과정들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인류학적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이런 식의 ‘어른 되기’의 특징은 보다 복잡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구전문화권이자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는 성인식 자체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위한 입문식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인식은 통상 큰 위험을 동반하는 ‘통과의례’를 요구한다. 한 예를 들자면, 남태평양의 바누아투의 펜테코스트 섬에서 이루어지는 점프 성인식이 있다(번지점프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나무로 만든 점프대에서 나무 덩굴을 발목에 묶고 뛰어내리는 것으로 보통 땅에 머리를 부딪친다. 여기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면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이다. 종종 사망자가 발생하는 의례다. 이 외에도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 의식 혹은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의식을 통과해야 어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족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서구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러한 문화가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지만 말이다.


 


조선만 해도 이런 성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 관례라고 하는 성인식이 존재하지만 거기에 죽음의 위협이나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지는 않는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은 어른이 되기 위해 ‘폭력적 입문식’을 거쳐야 하는 일이 없었을까? 조선시대의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쳤다. 관직에 나간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신참 관리들은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라는 ‘신참 신고식’을 거쳐야 했다.[각주:7] '면신례'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을 보자.


보통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부임 즉시 ‘허참례(許參禮)’라 하여 일차 향응을 베풀고, 열흘쯤 뒤에 ‘면신례’라는 명목으로 다시 주연을 벌여야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선배관원들은 온갖 방법으로 신참관원을 시험하고 괴롭혔는데, 이 시련과정을 ‘면신’이라고 불렀다. 이 때 선배들은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고 직무상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물론 육체적인 가혹행위나 구타도 행하였다.[각주:8]


‘면신’이라는 말 자체는 ‘신참을 벗어난다’는 말인데, 그러기 위해서 금전적 손해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관습을 숱하게 금지시켰지만, 이 신고식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애초 고려 말에 권세가 자제의 콧대를 꺾어주기 위한 의도로 시작되었다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보인 그 끈질긴 지속성을 고려해 볼 때 역사적 기원도 실제로는 그보다 오래되었을 수도 있겠다("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조선의 사례는 성인식과 폭력적 입문식이 분기된 양상을 보여준다.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된 규모가 큰 사회에서 ‘정상적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실제 직무 집단에 소속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조선시대 관례가 조혼풍습으로 혼례와 밀접하게 결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각주:9] 실질적으로 사회적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과정을, 면신례의 ‘완료’ 시점까지 확장할 수 있겠다. 


그런데 면신례는 고관대작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되긴 했던 것 같다. 주로 금품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며, 면신 전까지는 노비마저도 대들 수 있는 ‘애매한’ 위상을 갖는다. 그러나 고관대작의 면신례에서 폭력적 의식이 수반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구타나 가혹행위와 같은 고약한 신고식은 비교적 사회 초년생에 해당하는 직급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적 신고식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근절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가끔 외신을 통해 보도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신고식(운동부 사례가 많다)을 보면 말이다. 해외의 사례에서도 신참자들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폭행을 당하고, 얼차려와 같은 가혹행위를 당한다.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고 물건이나 동물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전이적 상태에 놓인 신참자들이 애매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시될 수 있을 텐데, 이런 설명은 왠지 동어반복적인 느낌이다. 왜 이런 신고식이 곳곳에서 행해지는 걸까?



왜 인간은 ‘폭력’과 ‘위험’을 필요로 하나?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사람들의 몇 가지 특수한 행동 패턴에 주목해 보자. 어린 아이들은 특정한 연령대가 되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하는 등 위험한 활동을 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청년기의 젊은이들은 그보다 더 위험한 행위를 하곤 한다. 아주 아찔하게 높은 곳에 올라가서 위태롭게 매달린 채 사진을 찍거나, 높은 절벽에서 강이나 바다로 뛰어내리거나, 건물들 사이를 뛰어 넘고 건물에서 벽들을 타고 위험하게 뛰어 내리거나 덤블링을 하며 땅바닥에 내려오는 경우도 있는데, 불행하게도 가끔 사망자가 발생해서 언론에 소개되곤 한다. 물론 그 이후 연령대에서도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들(익스트림 스포츠 등)이 있긴 하지만 젊은이들이 하는 것 같이 무모해 보이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이들은 왜 자발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일까?



인지적 능력과 판단력이 덜 발달된 상태에서 위험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와서는 조금 다른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아이들은 자기 행위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데 여간해서는 실패하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을 과장해서 판단하는 경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또래의 평판을 중요한 행동 기준으로 삼게 됨으로써 무모한 행위를 감행한다고 한다(“십대의 위험한 행동 이해하기”).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정체성을 수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모 등 어른들의 가르침과 명령보다는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이나 자신이 속한 또래 공동체가 선호하는 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험한 행동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동시에 그 능력에 대한 또래 집단의 인정을 통해서 사회화를 이루는 전략적 행위이다. 전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시험과 증명이 또래 집단 내의 권위 획득과 모종의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위험은 회피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생존 가능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 개체의 생존, 특히 사회적 환경에서의 생존은 단순히 물리적 위험을 회피하는 수준에서만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떻게 다른 개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된다. 또래의 평판은 또래 집단 내 위계를 구성하는 내러티브에 담긴다. 위험을 감수한 행위는 그러한 ‘평판의 내러티브’[각주:10]와 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또래 집단의 협조와 협동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허풍은 수컷의 본능?").[각주:11] 


위험을 무릅쓰는 자기-폭력적 행위가 특수한 맥락에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사실이다. 한 중국 청년이 감행했던 청혼을 위한 1,600km 걷기, 포레스트 검프의 북미 대륙 횡단, 독일 청년의 4,600km 중국 횡단, 자전거로 세계일주하기 등등이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끎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위험한 행위, 폭력적 행위, 일탈적 행위들은 이처럼 상징적 가치를 생산한다. 물론 이런 행위를 통해서라도 평소에는 식별되지 않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의 대응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가 확인된다. 물론, 비슷한 ‘금수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폭력적 의식’과 사회성


그러나 자기-폭력적 행위와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집단의 폭력적 행위는 다르다. 우리가 조금 더 해명해야할 것은 후자일 것이다. 강제적인 집단 폭력이 가학성을 가진 인간들과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상대적 약자이자 수동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우연히 발생한 역사·문화적 현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러한 폭력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이것이 모종의 자연적인 인간성과 관련된 행위일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뒤르켐을 떠올릴 때, 이는 집단적 유대를 창출하기 위한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폭력일까? 뒤르켐의 이론을 들여다보더라도 굳이 의례가 인간들 간의 폭력을 수반해야 할 필요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행위가 사회로 진입해 들어가는 연령층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뒤르켐의 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 이 한계를 넘게 해 줄까? 희생제의와 입문식의 유비를 통해서 다양한 생각을 환기시킨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희생제의 이론으로 입문의례를 설명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이 시기는 사회적 위상이 바뀌는 시기인데, 사회적 위상이 바뀌는 것도 일종의 ‘불확실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니, 이 같은 전이기에 나타나는 폭력적 구조는 어떤 면에서 이전 세계의 ‘중지’와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지시한다고 말이다. 물론 ‘창조’는 참여자 개인의 관점에서만 그런 것이고, 집단의 관점에서는 기성의 체제를 그 개인에게 ‘이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이기의 의례는 인간성을 ‘재프로그래밍’하는 극적인 사회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과정이 왜 ‘폭력적 구조’를 수반해야 하느냐는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이전 세계의 ‘중지’나 적극적인 ‘소거’는 폭력이 아닌 다른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폭력이 동반되는 입문식이 있는 집단은 대체로 낯선 사람들이 모여 조직화된 위계집단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른 집단과의 경쟁관계에 놓인 집단(운동부, 체육학과, 군대, 회사 등)의 경우에 그런 의식(儀式)을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쟁을 위해 집단 내 협력과 협동이 요구되는 조직에서 폭력적 의식이 빈번히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효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친밀성이 접촉 시간에 비례할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잘 이해된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조직은 친밀성을 기반으로 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또 조직의 통합을 저해하는 행위는 집단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감정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사회적 감정을 함양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조직화된 집단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친밀감과 사회적 감정을 일거에 효과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게 하는 공동의 경험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집단의 폭력적 입문식이 그러한 강력한 공통 경험을 갖게 하는 효율적인 장치일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폭력적 의식은 '사회성'을 만드는 장치가 된다.



폭력과 기억, 그리고 생존


여전히, 왜 폭력이 그런 효율적인 기제일 수 있는가가 물어질 수 있다. 이 부분은 기억의 메커니즘이 일정 정도 해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생각해 보자. PTSD는 심각한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생기는 의학적 증상이다. 이 경우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은 아주 빈번하게 세부적으로 일어나며 환자들은 거기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한 끊임없는 반추를 통해서 해당 사건은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거나 규정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 강박충동장애(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OCD)를 보자. 많은 경우 OCD는 전염과 오염을 회피하는 기제로 진화되었다고 설명되지만, 부정적인 기억이나 관념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발현되는 경우도 말해진다. 기억의 문제와 관련해서 PTSD와 OCD는, 위험한 폭력적 행위가 ‘의미 생성’의 효과적인 기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진화심리학적인 설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생존을 위협했던 사건을 ‘잘 기억’하는 개체가 비슷한 패턴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고, 인간이 그런 개체들의 후손이라서 위협적인 사건을 잘 기억하도록 진화되었다고 말이다. 이런 설명을 전제한다면, 어렵고, 힘들고, 위험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은 ‘유사 PTSD’를 낳을 것이다. 한편 생물(특히 인간)은 생존의 위협을 무사히 회피했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어려운 일을 해결했을 때도 작동). 그것이 카타르시스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한 기제들은 인간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서 살아남았을 때 누릴 수 있는 생화학적 보상체계였을 것이다. 그것이 스트레스적 상황에 대한 직전의 대처를 ‘좋은 것’으로 평가하게 해 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 집단의 협력을 통해서도 이러한 개체의 생존성 향상 기억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협동을 통해서 위협을 물리쳤다든가, 위협적인 동물을 협동을 통해서 사냥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상황 말이다.


PTSD의 대표적 사례는 참전자들의 사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쟁 경험은 그 어떤 동료애보다 끈끈한 동료애를 만들어낸다.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드라마 말미에 전쟁이 끝나고 패전한 독일 장성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다.



제군들, 길고도 힘겨운 전쟁이었다.

제군들은 국가를 위해 용감하고도 자랑스럽게 싸웠다. 

제군들은 특별한 군대다. 

제군들은 오직 전투에서 전우 사이에만 존재하는 또 다른 유대를 발견했다.

제군들은 참호 속에서 함께 절박한 순간순간 서로를 붙들었다. 

제군들은 함께 죽음을 보면서 고통받았다. 

제군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복무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제군들 모두는 평안 속에서 길고도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아주 세부적인 회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형제'가 되어 수십년이 흘러서도 주기적으로 만나며 그때를 회상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영웅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전우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폭력은 기억을 효율적으로 강화시키는 기제이며, 그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유대를 효과적으로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입문식?


그러니 아름다운 대안은 없는 것 같다. 폭력적 입문식을 제도적으로 억압해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이미 거대 집단을 형성해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현대인들이 지금의 생물학적 구조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한 ‘폭력적 입문식’은 어떻게든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유토피아에 가까워지면 좀 더 나은 입문식이 등장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부조리를 새로운 부조리로 대체하는 시시포스적 노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집단화 기제로서 폭력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폭력적 입문식에 최종적인 면죄부를 선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구축해 발전시키고 있는 생명, 인권에 대한 이해가 그러한 폭력적 행위를 단죄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육과 훈련, 그리고 입법과 사법적 규제를 중시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행동 방식은 본능만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서도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시시포스적 ‘어른 되기’


한국사회에서 오늘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금 ‘어른’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구성해 낸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부조리’의 크기만큼 그것을 반전시키기 위한 정당화의 폭력은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질서에의 순응은 순수한 정당성을 지시하는 상상 속의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는 신화(광의의 ‘법’)에의 굴복을 개인들에게 요구한다. 그 굴복이 의례적인 흉내 내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위계화된 사회 질서, 불안을 강요당하는 사회 질서를 흉내 낼수록 ‘부조리한 현실’, ‘부조리한 과거’에 대한 상상은 더욱더 뒤틀린 채 우리를 엄습한다. ‘지옥’에서의 복종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흉내’의 가면을 계속해서 쓰고 있는 한, 파열된 세계상은 지속적인 긴장을 잉태하며 내외의 폭력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러나 가면을 벗어버린다면 긴장의 압력이 내부로 향하며 세계상의 전복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새로운 가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잠시의 ‘희열’을 맛보게는 해 줄 것이다.


산의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행복한 시시포스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알베르 까뮈


이렇게 보면 이런 문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늘 쳇바퀴 돌 듯 문제는 반복될 것이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도 그럴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빚어내는 현실에 대한 이해는 늘 시도할 수밖에 없다. 사유하지 않으면, 그리고 묻지 않으면 그 쳇바퀴 밖의 관점을, 그래서 우리를 제3자적 관점에서 그려보는 일을 할 수 없다. 자기 객관화 없는 성숙은, 개인 수준에서든 집단 수준에서든 간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1. 2006년 한겨레는 ‘폭력에 길들여진 대학사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연재를 통해서 체육학과 등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신고식 문화를 고발한 바 있다. “이것도 ‘체대식 예절교육·체력단련’?”(2006년 3월 15일) 등 참고. 이 신문은 2007년에도 대학가 폭력적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문제를 다뤘다. “비오는 날 정문앞 팬티바람 얼차려 “여기가 대학교 맞아?””(2007년 3월 8일). [본문으로]
  2. 누리꾼 발끈 “군대 모욕이다…군엔 조폭문화 없다” (한겨레, 2006년 3월 9일). [본문으로]
  3. ‘관종’은 ‘관심종자’의 줄임말이다. 이 말은 누군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으로]
  4. 이런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공익적 내부 고발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한국의 실정을 떠올려 봐도 충분할 것이다. “공익제보자의 59%가 자살충동 느껴. 배신자 취급, 왕따, 생계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이건 우리 사회의 뒤틀린 자화상을 보여주는 아주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5. 조너선 스미스, 《종교 상상하기》 6장 참고. [본문으로]
  6. 이 리스트에 ‘지・옥・고’가 추가되었다.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에서 딴 말이다. [본문으로]
  7. 허참례와 면신례를 합쳐서 ‘신참례(新參禮)’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8. “면신례”,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본문으로]
  9. 최종성, “일제강점기의 의례 매뉴얼과 민속종교”, 한국역사민속학회 220차 연구발표회 자료집, 2017, 12쪽 참고. [본문으로]
  10. 여기에서 ‘평판의 내러티브’라고 한 것은 ‘허풍’과 ‘속임수’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증인이 모호하거나 혹은 조작된 경우일지라도 그럴 듯한 이야기라면 평판을 높이는 데 유효하다. [본문으로]
  11. 《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사회성: 두뇌 진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 등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