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역사'와 '역사적 신화'", 이 타이틀로 글을 냈었다. 2016년에.



이 논문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 한신대 종교와문화연구소. 간행물>종교문화연구>26호 신화와 콘텐츠..로 들어가 아티클 클릭.


이 글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룬 사례들을 활용해서, "승자의 역사와 신화적 역사"의 논의를 확장해서 완성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신화'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화'라는 게 '종교' 개념과 마찬가지로 역사-문화적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사람들이 가진 어떤 일반성을 포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 개념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전범으로 하는 인간화된 신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로마 신화만 하더라도 그냥 '신들의 이야기'로 포괄할 수 없다. 도시 건설 이야기, 영웅의 성장 이야기 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 개념을 다른 문화권의 신비한 이야기에 적용할 때, 신화 개념 적용의 타당성을 묻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신화가 '제대로 된 신화'이고 나머지 지역의 신화라고 불리는 것들은 아류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다.


'한국 신화', 이 말은 '한국의 신화'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들어간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규원사화》  등의 기록물 속 이야기, 민간전승, 무가 전승 등을 '민간 신화', '무속 신화' 등으로 부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구분은 기록 형태에 따른 구분이고, 내용상 우주창생신화, 영웅신화, 문명기원신화, 건국신화 등등으로 분류된다(두백, '한국신화').


지금이야 이런 분류학이 정리되어 있지만 '신화' 개념이 우리에게 낯설던 개항기에는 우리에게 신화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 안에서 신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담과 전설로 분류되던 것이 신화로 인정되기도 했다. 이 세 범주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신화는 자연적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이고 역사성을 지닌 개념이다. 애초 mythos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 시대 이전에 logos와 대비되어 '진실한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logos는 '기교적이고 수사적인, 남을 속일 수 있는 교활한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브루스 링컨, 《신화 이론화하기》 참고. 호메로스 시대의 '뮈토스'는 권위 있는 '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시대에도 '거짓 이야기'와의 대비는 존재했다. 이 시대의 '진실'과 '거짓'은 일어난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링컨이 헤시오도스의 글에서 읽어내는 용례를 보면 전쟁, 법정이라는 '싸우는 자리에서의 공격'과 관련되고 있다. 그것은 권력자 남성의 발화이기도 하다.


신화가 민족의 발견과 함께 새로이 각광을 받으며 다시 주목될 때도 이 말에 대한 '긴장'은 지속되었다. 민족의 고유한 심성을 담은 '진실한 이야기'라는 해석과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허구적 이야기라는 해석이 대립하였다. 신화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전자의 관점에서 합리화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제3세계의 '자국 신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발굴 혹은 발명되었다.


신화 개념은 그렇게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그러니 '신화'를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신화라고 불리는 핵심 모델(그리스-로마 신화)과 그 유사물(단군 신화 등등)로 '신화'를 상상할 게 아니라 신화를 둘러싼 긴장의 특성, 그것의 일반성에 근거해서 신화를 바라보면 어떤가?


신화, 그것은 '진실한 이야기'이자 '거짓 이야기'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자,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를 언제 만들어 내던가? '진실이자 거짓 이야기'


1. 진실이자 거짓.


정말 순수하게 '문학'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두 '지어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현실의 어떤 실상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되면 '참된 이야기'라고 여긴다. 문학도 그렇다면 넓은 범주의 '신화'로 상상할 수 있을까? 모든 문학 작품이 이러한 특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모두는 아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진실한 이야기'로 소비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유행'의 측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진실성을 어필하는 면이 있다.


2.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인다.


'힘'을 가진 이야기, 근대에는 단연 '팩트'가 그러한 힘을 가진 이야기의 '기본'이다.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사실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역사를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http://memolition.com/2017/01/17/9-historical-myths-we-need-to-stop-believing/


역사는 '어떤 판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통상 '다른 버전의 기억'을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역사가들의 '합의'에 의해서 말이다. 이 합의의 과정은 보다 '과학'스럽게 표현될 수도 있지만, data의 객관성을 판단하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공통된 관점'이라는 측면에서의 '주관성'은 줄곧 남겨진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항상 '누군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통상 앞의 수식어인 '누군가의'를 생략한 '순수한 사실'인 양 행세한다. 세계사가 유럽-미국사 중심인 것이라든지, 과거의 역사가 왕들의 역사, 정치사가 중심이었다든지, 그래서 역사를 두고 '승자의 역사'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럼 '민주적'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승자의 역사와 신화적 역사"라는 글에서는 이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신화적 역사'와 '역사적 신화'"라는 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조금 해 보았다. 현실 민주주의가 '다수의 결정'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나듯이 이론적 의미의 '민주적' 사실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수의 결정'은 한정된 정보, 정보 접근성의 차이 등으로 인해서 쉽게 '소수의 결정'이 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항상 '속임수', '은폐', '음모'가 피어난다.



이런 이야기는 '신화'나 '역사'의 한계를 사유하기 위한 게 아니다. 그것이 서로 분간될 수 없는 특성이 있다는 점, 그것이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 탓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점, 그러할 때 '신화'를 어떻게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 '신화연구자의 일'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위 글의 논의에서 '신화적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는 허구로서의 역사'를, '역사적 신화'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허구로 받아들이는, 과거의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인 이야기로서의 신화'(통상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화'를 이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함)를 말한다.


신화연구자는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진실'로서 과거의 이야기를 재편하는 데 골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화하고 정당화를 위해 정보를 선택하는 과정은 우리의 인지처리 방식의 아주 기본적인 전략으로 개인 수준이나 집단 수준이나 어김없이 나타나며, 인간 집단의 정보처리 방식이 근원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화석화된' 이야기, 우리가 통상 '신화'로 이해하는 그런 이야기만을 신화연구자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도 부조리해 보인다. 지금 '진실이자 거짓, 거짓이자 진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들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사라지거나 지속되거나 하고 있다. 또 그런 이야기들이 각 학문 분야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특정 사회의 '신앙적 사실'이 되기도 한다.


성상 파괴적 기획이나 상징화/미화의 기획('고유한 신화'라거나 '집단정신의 보고'라거나 하는 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신화' 개념의 해체, '역사' 개념의 해체 작업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우리만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그것이 함의하는바, 그리고 공동체의 이익 혹은 '보편적 가치'로 상상되는 기준, 즉 '어떤 신념'에 입각한 진단과 평가를 하는 것이 되겠다.


1. '신화'라는 대상의 변화...지금 우리가 '진실'로 받아들이는, 그러나 다소 허구적인 이야기 모두


2. 성상 파괴적 기획/상징화 기획이 아닌 문화 비평적 기획


문화 비평적 기획에는 다분히 '신념'에 입각한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의 차원이 존재한다. 신화연구는, 그런 의미에서 


3. 하나의 '참여(앙가주망)'일 수밖에 없다.


사실 "'신화적 역사'와 '역사적 신화'"라는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신화'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화석화된 허구적 이야기에 대한 논의로 보였기 때문이다. 학위논문을 쓰면서 이 영역에서도 대상의 확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신화'라는 표제를 전면에 내 건 작업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이 여전히 '역사적 신화'를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화적 역사'에 훨씬 관심이 있다.


그러니 나의 연구 작업에 대해 '이건 역사학', '이건 정치학', '이건 국적불명'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쓴 논문도 이렇게 '퇴짜'를 받았다. 한 심사자는 해당 논문이 '국가-지역'의 차원에서 상징화를 논하고 '종교적 상징화'를 다루지 않으므로 다른 저널에 투고하라고 안내해 주었다. 연구재단에 연구과제를 신청할 때도 종종 듣는 말이다. 종교연구자인가? 아니면 다른 분야의 연구자인가? 이건 우리 영역에 맞지 않는데? ...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 기성의 과점과는 다르게 '종교'와 '신화'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을 중심에 두면, 연구대상을 제도화되고 기성화 된 종교에만 국한할 수 없고, 화석화된, 모두가 허구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로서 신화에만 국한할 수가 없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런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적 삶을 살아가고 신화적 이야기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숭고한 신앙심이나 집단의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이겨 먹기 위해서, 공허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그저 편하기 때문에 그러고 있다.


동시대인과 소통하는,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증진하는 그런 연구만이 '쓸모'의 가치를 확인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종교학이, 이러한 신화학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학과 신화학의 경계마저도 교란하는 그런 것으로서. 그래서 나는 특정 학문의 담장 안에서 나올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인간'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이 믿음의 전도사는 분명 내게 구형찬 박사였다).


글: 심형준


※ 본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STEINSFACTORY)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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