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기사의 골자는 중반부 이후에 제시된다.


우리는 온라인 정보가 가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까. 학계에서는 이를 ‘웹 신뢰성 평가’라고 부른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정보가 ‘신뢰할 만한가’와 ‘전문성은 있는가’ 등 2가지 기준과, ‘발화자’(출처가 어딘가), ‘말의 내용’(편향된 내용은 없는가), ‘디자인’(웹 디자인이 조악하지 않은가) 등 3가지 내용을 조합해 6가지 영역의 매트릭스를 동원해(물론 의식적으로 동원하는 이는 없겠지만) 정교한 평가를 내린다. 문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이런 매트릭스가 쉽게 헝클어진다는 점이다. 트윗에 리트윗을 거듭하거나 카톡이 전달에 전달을 거듭하면 어디까지 사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을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대형 서비스 업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해결해왔다. 이런 업체들이 짠 알고리즘이 선별해주는 검색 서비스 추천이나, 소셜네트워크의 뉴스피드 등의 정보를 믿어왔다. 최근 가짜뉴스가 화제가 된 이유는 갑자기 가짜가 판을 쳐서라기보다, 이런 우리가 믿고 맡긴 ‘판단의 대리자’가 정보의 평가에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앞엔 두 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는 더 강력한 대리자를 만들어서 판단을 계속 맡기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맡겨두었던 판단을 자신이 좀더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 길일지 판단하긴 쉽지 않지만, 편하다고 누군가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기묘한 정치 지도자에게 핵폭탄을 맡기는 것처럼 말이다.


'카더라 통신'이 리트윗, 공유 등으로 전파되어 정보의 본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판별하는 것이 좋을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전문가에게 판단을 맡기는 경우에도 한계가 있으며, 주체적인 비판적 판단을 통해 보완하고자 해도 그게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저널리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가짜 뉴스 문제는 중요한 문제다. 저널리즘이 '팩트'에 기초해 있지 않다면 '객관적 정보 전달'로서의 언론의 기능이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저널리즘이 팩트을 어떻게 은폐하고 왜곡하는지 낱낱이 보아왔다. 그것이 특정 정치세력이 집권하여 두드러진 문제라면 정권교체가 된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 언론의 그러한 왜곡 행위는 '과거의 일'이 될 것이라고, 또는 일부 보수적 정치색의 언론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한겨레신문 등은 현 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가 고초를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을, 과거 정권의 입맛에 따라 국정원이 앞장서서 이미지화한 '한걸레'라는 이름을 써서 비난하였다. 사람들은 '입진보'를 운운하면서, 언론이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갖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정보의 '객관성'이 판단되는 현실을 비춰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언론의 주장, 정보라는 게 언론인(혹은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관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사실상 저널리즘에 '순수한 정보'는 없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 사실'로서 통용될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자체가 하나의 관점의 산물인 점은 부정되지 않는다.



'구술성'은 구전전승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주로 논의된다. 구전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고,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원본을 생각할 수 없는 정보 전달 체계이다. 문자전승은 '기록된 문자' 덕분에 기억 의존성이 약화되고, 정보의 고정성이 강화되며, 그래서 정보의 축적이 용이하게 되어, 원본을 따질 수 있게 된 정보 전달 체계로 이해된다. 그런데 '가짜 뉴스' 문제는 문자전승의 이러한 특징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이는 다분히 문자기록의 양적 팽창이 만들어 낸 효과이다.


일찍이 월터 옹은 그의 책 Orality and Literacy(1982)에서 '2차 구술성'secondary orality을 이야기하였다. 전자 기술의 발전으로 야기될 일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전화, 라디오, TV 같은 매체에서 문자 정보를 근거로 만들어진 구술 정보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구전성을 말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의 발달이 '텍스트' 자체의 구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든다.


텍스트 생산자가 특별한 전문가가 아닌 시대, 전문가 생산 텍스트와 비전문가 생산 텍스트가 그 중요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매체(특히 인터넷, 소셜 미디어 등)에서 유통될 때, 더 이상 '텍스트 정보'의 특별한 가치가 유지될 수 없게 된다.


말로 소문이 전파되듯이 이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텍스트 소문'이 전파되고 있다. 과거에는 분명 그러한 성격의 텍스트 정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권위가 뒷받침된 정보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신문, 책 등), 지금은 그보다 더욱 광범위한 영역에서 많은 양의 새로운 정보와 가짜 정보가 뒤엉켜서 '권위' 자체를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럴 때 정보의 신뢰도 판단은 구술정보의 신뢰도 판단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뇌'라는 정보 처리 체계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서 나온 정보(가령, 그런 사람이 공유한 정보), 내가 믿고 싶은 정보(정치적 입장 등), 과거에 익히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정보와 연결된 정보, '위험예방체계'를 자극하는 정보(공포는 직관적 판단을 쉽게 자극), 기억하기 쉬운 정보(극적 구조를 가진 스토리텔링이 된 정보) 등이 주목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전략이 정보의 진실성을 정확하게 판단하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해 줄 수 있는 장치(인공지능으로 신뢰도를 평가한다든지)를 개발해서 대안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오염과 오류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인간은 언제나 '신화의 시대'를 살아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제 정말 '신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과거에는 문자 정보의 '객관성'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에 별 저항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자의 그러한 가치가 뉴미디어 환경에서 증발해 버리면서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버렸다. 신화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학문적 논의의 차원은 이와 질적으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거기에는 항상 '검증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갖는다. 어떤 정보나 이론은 검증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을 요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공론장에서는 '검증'이 완료되기 이전에 이미 정보가 확산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평가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의 차별성이 잘 수용되기 어렵다.


2차 구술성의 시대에 종교연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겠다.


글: 심형준


※ 본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STEINSFACTORY)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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