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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생로병사

생로병사: 종교학적 자리에서의 자전적 에세이_정진홍



  

  나는 내 출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내 출생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내 출생을 예상하지도 않았으며, 내 출생을 스스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 출생을 당연히 자축했을 까닭이 없다. 나는 내 출생에 무지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출생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출생 이전에 나는 없다. 나는 내 출생과 더불어 ‘있기’ 비롯했다. 나의 없음과 있음을 가르는 계기가 내 출생인데,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 출생과 내가 전혀 무관한 채 내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내가 나도 모르게 내가 되었다는 것은 지극한 ‘부조리’이다. 나 스스로 나의 있음의 자리에서 나의 없음의 자리를 바라볼 때 그러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없음의 자리에서 내 있음을 일컫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현존한다. 그것은 너무 다양하고 얽히고 몽롱하고 때로는 놀랍고 때로는 두려워서 내 있음으로는 감당하기 버겁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나와 아랑곳없이 쉼이 없다. 듣다 보면 짜증도 나고 지루하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몰두하게 하기도 하고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게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 이야기의 구조는 헤어날 길 없는 소용돌이다. 나는 늘 빙글빙글 돌아 처음자리에 되돌아오지만 다시 끝자리로 나아간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실재하는지, 아니면 내가 내 없음과 있음에 엉키어 그것을 풀려고 다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주 어렸을 적이다. 어머님께서 늙은 호박을 따다가 이를 썰어 마당 빨랫줄에 너실 때면 나는 내 생일을 예감했다. 그것은 배추를 뽑아 텅 빈 밭에 서리가 내릴 즈음과 거의 같은 때였다. 생일 점심때 나는 호박꼬지를 넣은 백설기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으레 아욱죽을 먹었는데, 떡에 쓴 쌀을 어머님께서는 그렇게 채우셨다. 

  나는 누님들 둘에 이어 ‘마침내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당신 친구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내 맏상제요.’ 하시던 것도 기억난다. ‘아들’과 ‘맏상제’의 함축을 터득하는 데는 무척 긴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터득은 나의 출생을 설명하는 소음의 소용돌이와 함께 있었다. 그 세월은 내게 꽤 팽팽한 긴장의 지속이었다. 이유 있음과 이유 없음의 뒤섞임이, 그리고 책임 있음과 책임 없음의 얽힘이, 나와 이어진 ‘사실’인 것일 때, 그 긴장은 자연스레 내게 그 사실을 간과하고 싶은 현실이게도 하였다.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질끈 눈감아버리면 모든 사물이 가벼워진다는 경험은 상당히 편리한 해답으로 내게 참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라고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부끄러운 증언이지만. 

  아무튼 나는 애써 그 소용돌이에 무관심하려 했는데, 그러다 어느 결에 그 소음들이 실은 나 있기 이전에 있었던 어떤 주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한테 하는 발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졌는데, 그래서 그 이야기의 주체들이란 실은 나의 다른 주체들일 거라는 생각에 경도(傾倒)되었는데, 다행하게도 나는 그러면서 그 긴장을 조금은 느슨하게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 경사의 내림 길을 이어 살아간다. 그 끝이 어디인지 조금은 불안하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의도하지 않은 일인데도, 나도 모르게 내게 과해진 일인데도, 그 일을 불가불 꾸려가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그랬다. 차마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참으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나는 먹고 싸고 놀고 잠자고 하면서 ‘자라고’ 있었다. 남들이 나를 꽤 자랐다고 했을 때 나도 나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때 내게 일었던 삶이란 온통 꿈으로 범벅이 된 것이었다. 삶의 주인이란 자신의 삶을 자기의 꿈으로 채우는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 꿈은 이른바 ‘꿈의 실현’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꿈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겐 꿈과 현실의 갈등이 자주 일었다. 꿈에 오줌을 누면 참 시원했다. 그러나 그 꿈은 현실에서 요를 모두 적셨고, 나는 키를 머리에 이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받아와야 했다. 그래서 그랬겠는데, 가끔 꿈이 무서워 어서 깨어나야겠다고 꿈꾸면서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거듭 말하지만 삶보다 꿈이 더 좋았다. 꿈에는 날개를 달고 날 수 있었다. 나는 꿈을 꿀 수 있는 밤이 좋아 하루가 즐거웠다. 그러면서 꿈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안위라는 사실 때문에도 밤을 품은 낮이 즐거웠다는 사실마저 첨언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래도 정직하지 않을 듯하다. 

  아무런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겪은 것은 내가 꽤 자란 뒤의 일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꿈을 꾸려는 생각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를 안 것이라고 말해야 할 텐데,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사치스러움을 누릴 아무런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누군지 내게 강요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 아마도 그때부터 삶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힘든 것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진 것일 거라고 지금 생각한다. 그때는 내가 내 이야기를 모두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을 터득한 때와 같이한다. 내 몸의 현존을, 몸이 있어 내가 있음을, 그래서 내 실존을, 부모 탓이라고 해도 좋을 거라는 발언을 하고 싶은데 나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자랐었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해도 좋다. 삶은 꿈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내 출생과 이어진 그 많은 이야기의 소용돌이도 꿈의 출렁임과 다르지 않지 않으냐고 나는 아무에게나 묻고 싶다. 삶은 꿈이다. 꿈에서 깨어나도 꿈이고, 꿈에서 꿈을 꾸어도 꿈이다. 


  

  아버님은 찬데 따듯하셨다. 어머님은 따듯한데 차셨다. 나는 아버님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고자 했다. 아버님을 잃었을 때 나는 내 ‘마지막 자리’의 상실을 경험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사실이 내 꿈의 상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상실의 회복에 대한 기대로 내 생애가 점철(點綴)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꿈의 상실이란 없다. 

  ‘따듯한 자리’의 소멸을 안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데, 쉽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를 뇌이면서 나는 언제나 그것의 사실 아님과 그렇게라도 해서 내 현실에서의 아버지의 부재를 보상받아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다는 그것의 사실성 사이에서, 그래야 따듯함에의 귀착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의 사실성 사이에서, 편하지 못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사실은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나는 편했었다고 발언하고 싶은데, 그 발언이 엉키게 할 숱한 내 발언에 대한 남과 나 스스로의 메아리를 나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틀림없이 무서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처럼 살지 않았다. 그렇게 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뚜렷하게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서서히 어머님처럼 살고 싶어졌기 때문인데, 이제는 어머님처럼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감히 그렇게 내 삶을 스스로 애써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내가 바라는 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답답하다. 여러 색깔의 물감을 섞어 되지으면서 끊임없이 내 삶을 개칠한다. 꿈은 아버님 편이었지만 현실은 어머님 편이었다고 말하면 왜 내가 더 좋아한 아버님 편을 떠나 어머님 편에 섰는지를 조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러한 분류방식은 나를 거의 질식하도록 한다. 아무튼 이에 대한 반응은 실은 내 몫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 때론 절망적이기조차 하다. 그런데 내 삶은 긴 삶의 흐름 과정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내 몫의 영역을 벗어난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이 현실이다. 세월을 좇는다는 일이, 내게서는, 어느 틈에 그렇게 각인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뜻밖에 길었다. 왜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참 길다.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내 삶을 책임진다는 일이 ‘말도 아닌 것’이라는 자학을 일상화하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방금 말한 ‘책임’이라든지 ‘말도 안 된다’든지 ‘자학’이라든지 ‘일상화’라든지 하는 언어들이 갑자기 역겹다. 그렇게 발언하고 있는, 그러니까 그 발언을 낳은 내 삶의 경험을 그 언어들은 불완전해도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모자라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언어에 담으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싶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나마 담을 그릇이 그리 마땅치 않다는 것을 나는 넘어설 수 없다. ‘삶은 몸의 짓인데~’라고 탄식할 뿐이다. 겨우 발언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배고팠어요. 추웠어요. 아팠어요.’ 다음에 이어진 당연한 귀결은 분명하다. ‘죽고 싶었어요.’ 몸이 겪는 일은 몸을 버리면 없는 일이 된다. 몸의 발언은 늘 이렇다. 우리는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우리의 몸을 살면서도 몸을 지나친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사치라고 나는 말한다.    

  살면서, 그러니까 몸의 지속을 시간 속에서 확인하면서, 늘 배고프고 춥고 아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좋기도 했고, 그래서 웃기조차 했다. 그러나 몸의 조건과 분리된 그런 것은 내게 불가능했고 비현실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미워하기도 했고 분노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몸의 현실과 단절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두려움도 속수무책감(束手無策感)도 다르지 않다. 나는 삶의 과정이 이른바 정신적인 것이라든지 영적인 것이라든지 하는 주장과 만나면 그의 삶의 경험이 나와 어쩌면 이렇게도 이질적일 수 있을까 갸우뚱해진다. 너도 나도 몸의 현실을 살아가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게 참 부러운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청장년 때 늘 그랬는데, 지금은 더 그렇다. 몸과는 아무런 이어짐 없이, 몸을 넘어, 몸을 없는 듯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 훌륭했던 분, 내게 인간적이었던 분, 내게 꿈과 내일을 보여준 분, 그리고 참 많은 좋은 분들이 내게 그런 다른 사람들이었다. 부러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압도적인 거였는지 나는 그렇다고 하는 사실이 내 열등감조차 충동하지 못하면서도 내게 늘 있는 ‘정서’였다고 실토하고 싶다. 그 정서를 벗으면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스스로 슬프게 하는 것은 그 부러움을 감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쫓겼다는 사실이다. 가리고 숨기고 덮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 부러움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도 아니고 강박관념을 일게 하는 것일 수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술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묘사를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부러움에의 침잠 속에서 내가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실은 나를 편하게 한 것이라고 스스로 나를 다독거린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닿을 길 없는 것에 이르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어도 되었다는 자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싶다. 적어도 내 몸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까지는 그렇게 나는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은 정직하지 않다. 나는 어느 틈에 부러운 사람들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내가’ 한 일이다. 나이 먹음은 그렇게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누적된다. 그것이 또 다른 꿈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내가 범한 가장 지독한 사치였다. 나는 이를 위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과불(過拂)을 짐 지웠기 때문이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내게서, 그리고 그들에게서. 그런데 학교는 나를 욱죄는 틀 이상의 아무것도 내게 남겨진 흔적이 없는데도 나는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팔면서 그것으로 먹고 살았다. 지금도 그 여운에 실려 몸을 굴리면서 살아간다. 

  앎에의 탐구, 그 알쏭달쏭한 실체는 그때나 이제나 내게 지워진 천형(天刑)이다. 왜 나는 물어야 하나? 왜 나는 소박한 수용을 살지 못하나? 왜 나는 그 많은 훌륭한 분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름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나? 왜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도 앎을 빙자한 권위를 휘둘러야 하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자신하는가? 내심 인류의 지성사(知性史)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단언하고 싶은데, 그것은 천박하고 무지한 발언이라는 비난이 폭포처럼 내게 쏟아질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내 학문함의 세월이 나를 그리 어리석은 소박함 속에 가둬둘 까닭이 없다. 나는 내가 익힌 ‘학문의 기교’로 인류의 지성사는 경탄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발언해 왔다. 다만 나는 그 경탄의 내용을 결코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내 정직성을 유지한다고 스스로 나에게 설득하고 있을 뿐이다. 혹 누가 은밀히 물으면 나는 내가 불가피하게 참 사치스러웠다는 사실을 가늘고 낮은 소리로 발언할 터이지만 그것을 들어줄 만한 ‘좋은 사람’들은 이미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것도 꿈이다.  


  나이를 먹어 사랑을 했다. 몸이 자랐기 때문이다. 몸 없이 어떻게 사랑을 하나? 나는 그렇게 단언한다. 남자만으로는 모자란다고 내 남자가 스스로 절규하는데. 그런데 여자를 정말 만났을 때, 몸의 현존을 때로 넘어서는 전율을 사랑이라고 하고 싶어졌었다. 그 전율이 몸의 현실이 설명할 수 없는 몸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역설을 나는 처음으로 겪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기술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해도 좋을 듯하다. 나는 이를 몸의 퇴거와 몸의 새로운 내재(內在)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런 언표(言表)는 그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일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만큼 부자연스럽게 나는 남편이 되었고 아비가 되었다. 그 삶의 마디가 제대로 선명해지지 않는다. 겨우 발언한다면 누구나 신비의 한복판에 빠지면 판단을 잃는다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아니, 신비는 그 판단부재의 상황에서 비로소 신비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더 나아가 그 신비는 언제나 나를 자기 밖으로 내치면서 어서 나가 여기에서의 경험을 증언하라고 강요하는 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나를 신비스러운 불안에 떨게 한다고 하는 사실도 내처 말하고 싶다. 나는 신비에 쫓겨 내 삶을 서둘렀다. 삶이 신비를 좇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아니다!’라고 나는 단단히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마침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래서 드디어 내게서 발언되었을 때, 그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짐작 못한 놀라움이다. 공포이기도 하고 환희이기도 한다. 애써 가렸던 것의 절망스러운 노출이기도 하고, 이제야 획득한 자유의 처음 호흡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는 일그러지는 몸의 쇠잔함과 ‘버텨온’ 내 실존의 뚜렷한 기욺의 낌새를 확인했었다. 이제는 낡아진 것이다. 이렇게 삶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늙은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렇게 나를 알고 있다.  

  

  몸의 회복 불가능한 퇴행 과정에의 들어섬. 몸의 준거를 배제한 노년의 묘사는 거짓이다.  그러므로 노년을 일컫는 이러한 묘사는 참이다. 세월의 흐름에 실려 떠가면서 햇볕에 의해 퇴색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몸의 현실이 삶인 것을.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도 일컫는 초월이란 어쩌면 퇴행에의 저항을 개념화한 슬픈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지막 자기의 자존(自尊)을 지키려는 몸의 도로(徒勞)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초월이 몸의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것이 몸의 발언이라는 사실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도로이기 보다 몸이 애써 가꿔 결실(結實)한, 누려야 할 실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의 퇴행이 짓는 그늘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삶은 어차피 꿈인 것인데. 

  하지만 못내 불만스럽다. 세월은 흐르지 않는다. 아니, 세월은 흐르지만 삶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차근차근 쌓인다. 늙음은 제법 솟아오른 퇴적(堆積)이다. 그것은 집적된 덩어리이다. 길이가 길지 않아도 좋다. 자그만 탐침(探針)만 마련한다면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나는 내 몸의 현실이 거쳐 온 온갖 작은 조각들조차 내 지층(地層)에서 파낼 수 있다. 파 들어가면 내 탐침은 내 출생과 만나고, 내 지난 어느 날의 구름과 그림자를 만나고, 지금은 쉰이 넘은 자식들의 출생을, 그 순간의 그 아이의 울음을 만나고, 왜 기억나는지 모를 찌그러진 맥주 캔을 만난다. 맏상제의 태어남, 흩어지는 구름과 그림자를 짓던 햇빛, 아가의 울음, 버려진 깡통…. 그런데 문득 그 숱한 흔적들의 내일이 거기 탐침 끝에서 묻어난다. 그 잔 흙들이 못내 내 발굴을 더디게 한다. 나는 어느 틈에 먼산바라기가 되었다고들 말한다. 내가 그때 맏상제와 구름과 울음과 깡통과 더불어 어제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내일의 어울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않는다. 지층의 탐사가 나를 퇴적의 저변에 묻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 위로 날아오르게 한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해야 실감 있게 전할 수 있을지 애써보지만 나는 이미 철저하게 간과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늙음은, 내게는, 곧 사라질 몸인 것이니까. 그리고 곧 없어질 존재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病 

  손자가 배가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그 녀석 배를 쓰다듬어주면서 곧 나을 거라고 했다. 시간이 한 뼘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괜찮다고 일어선 녀석이 말했다. ‘할아버지, 이런 일만 없으면 참 좋은데!’ 나는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하고 말했지만 이것은 내가 내 손자에게 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정직한 거짓말’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거짓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 안 아프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망발이다. 여러 사람 욕보이는 일이다.

  몸은 불완전하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의 구조도 온전하지 못하다. 아주 많이 그렇다. 그래서 배가 고플 때부터, 그래서 허기져 하늘이 노랗게 빙글거릴 때부터, 나는 몸에 대한 신뢰를 모두 치워버렸었다. 내 몸을 담고 있는 이른바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 그렇게 말끔하게 지워버렸었다. 적어도 몸이 병들어 아픈 것과 관련해서는 그렇다. 병드는 것은 병든 사람의 팔자소관인 것을 어찌 나라님 탓을 할 수 있을 것이겠는가? 그런데 한 끼 밥을 든든하게 먹고 나면 온 세상이 달랐다. 내가 어려서 일을 하며 살았던 곳의 여전도사님은 때로 나를 불러 시장에서 장국밥을 사주셨다. 지금 곰곰이 헤아려보면 아마도 2년 동안에 그 일이 세 번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그분이 어머니처럼 나에게 늘 그렇게 해주셨다고 되뇐다. 고마움, 또는 염치없음은 먹기 전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국에서 고기 덩어리를 건져 모두 내 국그릇에 옮겨주신 그 넉넉한 포만을 만족하고 나서야 겨우 내게서 돋은 ‘현실’이었을 뿐이다. 배가 부르면 세상이 제법 살만했다. 몸에서 힘이 솟았다. 몸에 대한 자신감이 차고 넘쳤다. 그러면서 나는 가난은 병들게 하고, 병들면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하고 싶은데, 그 터득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현실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때는 왜 그리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의 이어짐만으로 몸의 아픔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아픔을 아파하지 않은 때였다. 

  몸의 아픔은 절대적으로 몸의 짓이다. 나는 문자 그대로 병드는 것이 싫고, 병들어 아픈 것이 두렵고, 병들어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속수무책의 경우가 저주스럽다. 내 아픔도 그렇거니와 다른 사람의 몸의 아픔도 그렇다. 내 피붙이의 아픔은 정직하게 말하건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질병’을 공유하며 아파할 만큼 선하지 않다. ‘그의 아픔’이 조금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질끈 눈을 감든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속은 찢어지는데 참여의 여지는 전혀 내게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몸과 나의 몸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앓는 이의 병상 옆에 서 있기보다는 티브이의 채널을 돌리듯이 그렇게 ‘타인의 질병’을 외면하는 것이 내게도 그에게도 정직한 것이 아닌가하고 고민하기도 한다.    

  게다가 질병은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가 없다. 의학적인 설명은 늘 넘친다. 그리고 더 친절해지고 있다. 원인과 처방은 날로 나아진다. 예방의학에 이르면 그 친절은 기가 막힌다. 일어날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설명을 나는 아픈 사람의 아픔에 참여하려면 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막상 아픈 사람의 아픔에 참여하려 해보면 그 설명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힘이 든다. 아픈 이에의 참여는 그 아픔에 대한 설명을 나에게, 또는 너에게, 해야 마땅하다는 불가능한 의무를 내게 안기기 때문이다. 괴롭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일과의 직면은 나를 비겁하게 하고 도망치게 한다. 살아가면서 나는 정말이지 늘 이런 일을 이렇게 겪어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왔었으니까. 그리고 ‘산다는 것, 다 꿈이지요.’하는 말이 차마 발설되기 어려운 경우가 바로 이 경우이기도 하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나 자신의 경우라면 나는 내 아픔에 아예 푹 빠져버리는 용기를 발휘하고 싶다. 가끔 그랬었다. 용기는 때로 설명을 폐기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몸의 아픔의 숙명적인 수용에서 비로소 승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언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피붙이의 아픔은 또 다르다. 그것은 함께 아파하고 싶은 ‘참여’나 마주치기조차 두려운 ‘외면’하는 몸의 아픔과는 다른 아픔을 삼킬 수 있게 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에서의 경험처럼, 이 경우에서도 몸의 현실을 넘어서는 아픔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질병은 몸의 현실이면서도 몸의 현실에서 비롯하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겪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 흔한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서술에 공감하지 않을 까닭은 없다. 종국이 초래할 몸의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동경에 감동하지 못할 까닭도 없다. 그런 이야기도 없다면 몸으로 인한 이 고통의 처절함이 말미암게 된 몸의 불완전성을 견딜 아무런 그루터기도 몸의 주체는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니까. 그래서 ‘오죽 몸의 아픔이 심하면 초월의 간섭을 못 견디게 아쉬워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르면 애가 탄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진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승인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겸손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몸은 앓아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나는 참 자주, 그리고 많이, 또한 오랫동안, 치병을 위한 기도를 했었다. 나는 그러한 기도가 내 성장의 궤적에 상흔처럼 남아있는 어떤 ‘충동’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참으로 주책없는 일반화라고 느껴지는데도 나는 그것이 사람 누구나의 일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누구에게 한 기도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길이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초월의 간섭을 요청하는 절규였을 뿐이라고 해야 옳은데, 이러한 진술이 소통을 이룰 까닭이 없다. 초월은 이미 다듬어질 수 없을 만큼 그것 자체가 엉켜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폐기하기 전에는 그 엉킴을 풀 길이 없다. 그러니까 초월은 나를 넘어선 나에 대한 희구였다고 발언해도 할 말은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초월은 몸의 현실이 낳는 필연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꿈을 살아가는 존재니까. 

  그 기도의 성취를 믿느냐는 물음도 내게 주어진다.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상당히 긴장한다. 그랬었다. 왜냐하면 내 현실에 대한 직설적인 서술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의 아픔이 ‘아직 아프지만 곧 가셔질 거야.’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답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발언이 의도와는 다르게 발언되는지, 또는 되어야하는지, 우리는 익히 경험하고 있지 않으냐고 항변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이란 희구가 내용일 수 없다. 사실은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늘 희구를 배신하곤 한다. 나는 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땀을 쏟고 숨을 멈추면서 내 바람이 아픈 이의 몸속에서 구현되기를 바란 적이 있다. 그러고 나면 몸이 휘둘릴 정도로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죄의식과 자학이 내 기도를 뒤따랐었다. 결국, 치유에의 기원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지 않으냐는 자문(自問) 앞에서 나는 내 언어를 잃곤 했었다. 아픈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그런데도, 너는 몸의 아픔과 만나면 또 기도를 할 거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의외로 잔인하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발언될 때 더욱 그러하다. 나는 내가 더 답변할 의무를 지니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그 물음주체가 짐작할 때까지 침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나는 치유를 위한 기도로 채울 것이다. 때로 우리는 질병의 고통과 직면하면서 오직 기도할 수 있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나는 무릇 기도란 몸의 아픔과 이어진 것일 때 비로소 기도다워진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어려운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드리는 기도는 편의를 위한 게으른 떼쓰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질병은 다르다. 그 아픔이 치유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수용될 때 비로소 꿈의 범주 속에 수용된다. 참으로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다. 몸의 아픔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거듭거듭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거듭거듭 기도한다. 그렇게 했다. 기도의 성취 여부를 묻는 것은 그가 질병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이 다만 기도라면 그것을 하지 않을 까닭은 없다. 질병은 내게,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로 있다. 몸이 현존하는 언제 어디에서나 그렇다.   

  사랑하는 여인이 숨을 거두었을 때, 나는 내 기도의 성취를 확인했었다. 이제부터는 결코 몸의 아픔을 이 여인은 겪지 않으리라는 위로 때문이었다. 성취되지 않는 기도는 없다. 우리의 삶은 늘 꿈이다.


 死 

  몸의 소멸은 아픔을 가시게 해준다. 삶의 마디마디에 낀 그 온갖 사연들도 잠잠하게 해준다. 그랬었다. 몸이 없으면 있는 게 없다. 남는 게 없다고 해도 좋다. 

  아낙네는 화장품을 아꼈다. 비싼 것은 감히 살 엄두도 못 냈다. 친구가 외국에 다녀왔다면서 사준 크림을 그녀는 아끼고 아껴 썼다. 그러다 유효기간이 그만 지나 아직 반도 안 쓴 크림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울상을 한 채 화장대 위에 얹어 놓고 있었던 것을 남정네는 기억한다. 아낙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남정네는 그녀의 화장대를 치우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난 어느 봄날, 남정네는 검은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 화장대에 있는 모든 화장품을 한꺼번에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낙네의 몸의 사라짐이 이렇게 완성되었을 때, 남정네는 갑작스러운 고요를 느꼈다. 없음과 있음이 아울러 제각기 자기 자리를 벗어나, 고요 안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고요가 아낙네를 어떻게 이어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몸이 더는 아프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고요가 남정네를 어떻게 이어갔는지는 그릴 수 있다. 그는 곧 그 고요에서 벗어나 소음의 현실 속에서 그의 삶을 이어갔다. 잊음은 상실의 흔적을 지워갔다. 몸은 고요 속에 머물 수 없어 몸이다. 몸은 언제나 새로운 오늘을 만나 새 삶을 빚는다. 다시 죽음의 고요 속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침묵의 늪에 들어설 때까지는 그렇다. 그렇다고 남정네는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이제는 없는 아낙네와 더불어 있었던 소음의 세계와는 다르다. 고요의 경험은 남정네로 하여금 ‘더불어 있었던’ 세월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삶을 스스로 숨 쉬게 했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다. 몸의 현실에서 죽음처럼 당연하게 ‘당연한 자연’이란 없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는 몸의 몸다움이 초래하는 자연스러운 몸의 현실이다. 그렇게 총체적이고, 그렇게 완결적이고, 그처럼 절대적인 현상이 다시 어찌 몸에서 일 수가 있겠는가. 몸은 언제나 삐거덕거리지만 죽음에서만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죽음을 구현한다. 그런데 그 일상이 사람들에게 사건이 된다. 마치 그 남정네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수습(收拾)한다.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망자가 각별하게 비일상적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실은, 모든 사건에서 그렇듯이, 망자는 치밀하고 정교한 ‘절차’에 의해 ‘치워’지는 것이지 ‘모셔’지는 것은 아니다. 수습해야 하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처치(處置)다. 흥미로운 것은 치우면서도 모신다는 기술(記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까닭은 어쩌면 너무 분명하다. 일상을 사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도 못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데 그 흥미로움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인 줄 알면서도 아니라고 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아니면 흔히, 우리는 늘 속고 속이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로 이를 가릴 때가 있다. 죽음의례에서 우리는 그렇다고 하는 사실이 극화(劇化)된 현실과 만난다.  

  까닭인즉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의 경우’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자기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기도 살아있는 자들에 의하여 치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은 좀 싫다. 그 싫음을 분석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가 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안다. 그런데 그거야말로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가장 버거운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사건화하는 일은 삶의 일상을 파열(破裂)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이 깨지는 것이다. 사건을 일상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최소한 사건이 야기할 일상의 깨짐을 예방하여 일상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각심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일상의 사건화는 다르다. 지극히 당연하게 있어 온 일, 있을 일, 누구나 겪을 일을 마치 꿈도 꾸지 못한 난데없는 없어야 할 일,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은 정상을 일탈하는 일이다. 그것은 바른 인식도, 성숙한 정서도, 고상한 지향도 아니다. 건강한 모습일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의례의 화려함은 일상의 처참한 붕괴와 비례한다. 죽음의 정치적 의례화에서 우리는 종종 그렇다고 하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이를 의도적으로 힘주어 발언하고 있다. 거듭 ‘사실이 그러니까.’라는 말도 곁들이고 싶다.    


  죽고 싶었었다. 춥고 배고팠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윽고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죽고 싶었다는 생각을 잊어갈 즈음에도 때로 그런 생각이 문득 들곤 했는데, 그때는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가 무어라 해도 죽음은 내 매일 아침, 아니면 매일 저녁의 현실이어서 죽음을 희구나 두려움이나 초조의 맥락에서 운위한다는 것이 근원적으로 현실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죽음은 그대로 내 삶의 현실이다. 그러니 나는 죽음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밖에 내가 지금 내 죽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실은 지금만이 아니다. 삶이 늘 그렇다. 그랬었다. 지금 그것이 더 짙게 내게 채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나만의 울안에서 이루어지는 독백인지도 모르지 않는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나도 모르는 자학이 내 속에서 가라앉지 않는다. 몸에 폭약을 두르고 시민들 한 복판에서 자신을 터트리는 사람과 그 일로 죽는 사람들, 그리고 며칠 전 우리 동네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배달청년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왜 ‘흐름의 마디를 건너 뛴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일상이기를 거부한 죽음을, 우리는 살아야 하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바르게, 정직하게, 누구나 서로 아껴주면서 잘 살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라고 하는 말이 내포한 온갖 사유(事由)의 설명이 넘친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는지, 그럴 수 있는 힘이 과연 그 설명에 담길 수 있을는지. ‘똑똑한 사람’들의 자기 정당화의 구실로 작동하는 것 말고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신비의 용출을 확인한다는 말의 성찬에서라도 무슨 출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내 못난 또 다른 사치일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과불하는.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내 죽음을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내 몸의 현실이니까. 

  아우가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달려가 아우를 만났다.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아요.’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래. 그렇구나.’라고 응수했다. 늦기 전에 사람들과 만나 풀지 못한 것들 모두 다듬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래야겠지.’라고 나는 말했다. 크리스마스 날 나는 아우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아우와 나란히 앉아 예배를 보았다. 아우가 눈물을 훔쳤다. 새해, 첫 주말, 아우는 자기가 차를 몰고 병원에 들어갔다. 그러기 전에 나는 아우와 영정사진을 사진첩에서 골랐다. ‘웃는 얼굴로 하고 싶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등산사진에서 그의 환한 얼굴을 찾았다. 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왔을 때는 통증완화센터에 있었다. 내게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라는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했을 때는 이미 섬망(譫妄) 현상이 가끔 나타날 때였다. 나는 그 찬송을 부르다가 나도 모르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우가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요. 아버지 노릇 대신 해주셔서요.’라고. 그리고 말을 이었다. ‘참 행복했어요. 우리가 이쯤 살아온 게요. 감사해요. 모두에게.’ 의사가 계수에게 인공영양제 공급을 중단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본인에게 이 말을 전했다. 아우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현을 했다. 웃음이 얼굴 전체에 흘렀다. 그리고 20시간 뒤 아우는 잠들 듯이 떠났다. 2월 1일 새벽 2시 17분이었다. 다음다음 날, 아우는 한 줌 재가 되어 어머님 옆에 묻혔다.  

  나는 내 죽음 다음에 아버님을 뵐 거다. ‘당신은 몸을 어디다 두고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하고 여쭈어 보고 싶지만, 저리게도 여쭙고 싶은 물음이지만, 아마 나는 그 물음을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못할 거다. 어머님도, 큰 누님도, 아우도 만날 거다. 사랑한 여인도 만날 거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을, 그러니까 살아있는 내 피붙이를, 그곳에서 기다릴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이 꿈 이외의 죽음 이후는 내게 사치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나의 출생으로부터 비롯하여 내 삶이 이리도 길게 흐른다는 사실, 흘러왔다는 사실, 그런데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를 선언하고 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채, 그래도 그렇게 주인 노릇을 하는 양 내 삶을 이어왔다는 사실, 나는 설명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삶을 설명하려 도로(徒勞)로 점철된 내 삶을 때론 측은해 하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생로병사에 그처럼 막연한 감사를 하고 싶은,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스스로 확인하는 나를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내 죽음을 맞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언이었으면 좋겠다. 내 몸의 마지막이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그 꿈을 살고 싶다. 아니,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아예 내 몸은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종교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고마운 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