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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공간과 장소

광장, 중심이라는 경계_심형준


광장은 도시의 한 복판에 있다. 그러나 광장이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중심’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기억은 그곳을 오히려 불안한 ‘경계’의 자리로서 묘사하도록 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지금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광장 이야기와 그 그늘에서 빛바랜 채 먼지를 뒤집어쓴 잘 기억되지 않는 혹은 기억될 수 없는 광장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고 싶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 공간의 경계성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올 봄까지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광장은 촛불로 가득 채워졌다. 그 목소리는 결국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고, ‘새로운 한국 만들기’의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터져 나왔던 ‘민주주의의 외침’이 더 각별하게 기억되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5.18과 6.10


사진출처: 5.18 기념재단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날들은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무슨무슨 기념일’로 되어 있는 날에는 ‘3.15의거 기념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4.13), ‘4.19혁명 기념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11.3)이 있다('국가기념일'은 그 외에도 '무슨무슨 날'을 포함한다).


광장을 ‘민주주의 성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때 공대 선배조차도 학내 학생 운동의 메카인 광장을 '신성한 곳'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성스러움의 감각은 아주 현실적이었다. 이러한 성스럽다는 규정 자체가 이 공간이 무언가 '분리'를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분리의 감각은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그 날의 기억’ 그리고 그 선택에서 ‘배제된 기억’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된 공간이라는 건 곧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신성성과 위험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양 벡터의 방향성은 고정 불변하지 않고 항상 유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중심’


아고라(agora)나 포룸(forum)을 떠올려 볼 때, 광장의 정치적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광장을 통해 직접민주주의나 시민의 정치참여가 환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광장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최근까지 매우 낯선 것이었다. 


광장의 더 중요한 특징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펼쳐졌는데, 재화의 교환만이 아니라 정보의 교환도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위정자들에게 그 공간은 프로파간다와 데마고기의 유포지였고, 사람들에게는 각종 정보와 유언비어를 얻게 되는 곳이었다. 광장은 권력이 투사되는 공간이자 사람들의 의사(意思)가 모이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도시의 중심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광장의 중심성은 종종 균형을 상실하고 흔들린다. 왜 그럴까? 광장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보자.


광장 기억‘들’의 일별


MBC 드라마 '화정'의 거열형 장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부터 극악한 흉악범을 비롯하여 체제에 저항했던 혹은 전복을 기도했던 ‘죄인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하였다. 그리고 그로인해 분해된 시체의 전시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대중의 공포 심리를 자극하여 체제 순응성을 학습시키기려는 권력자들의 의도가 반영된 일이었다. 옛 ‘광장’은 체제의 폭력이 투사되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저항은 광장이 아닌 산과 변방에서 이루어졌다.


체제의 성격에 따라 광장에서 전시되는 폭력은 양상을 달리해 갔다. 최근에 만난 한 노학자는 6.25 때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광장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느 유명인에 대한 인민재판과 그 주검의 전시로 점철되어 있다’고 했다. 비무장 시민에 대한 발포가 광장에서 이루어진 기억도 있었다. 또 우리는 광장에 탱크가 들어왔던, 암울했던 시절의 기억을 부정할 수 없다. 


1950년 7월 서울시의회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김팔봉의 모습이라고 알려진 사진 (사진출처: 김복희, 《아버지 팔봉 김기진과 나의 신앙》(1995)에서)


전남 도청으로 향하는 계엄군의 탱크(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광장은 선전의 공간이기도 하다. 국군의 날 이루어지던 군인과 무기들의 퍼레이드,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스타들의 퍼레이드. 그러나 퍼레이드는 국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전통’의 차원이나 현대의 놀이(혹은 관광)의 차원에서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로서의 퍼레이드도 존재한다. 성소수자(LGBT)가 배제되지 않는 '보편적 인권'을 선전하는 퍼레이드도 비교적 최근에 나타났다.


퀴어퍼레이드(사진출처: 오마이뉴스)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저항 공간으로서의 광장이다. 이 모습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한국 땅에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1919년 사람들은 태극기를 쥐고 거리로 뛰쳐나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외쳤다. 그런데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의 촉발에 핵심적 요인(정서적 의미에서)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교과서에서는 잘 주목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상해 대한적십자회'가 발행한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에 수록된 사진.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사진출처: http://mustory.khan.kr/)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분노


그것은 분노였다. 그것을 아직 왕정의 전근대적 감각을 유지하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나랏님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표출한 분노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에토스를 고려한다면, 그런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술적인 사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50여년을 한 나라의 군주로 여겨졌던 인물의 죽음은 결코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 그 자체의 ‘죽음’과 쉽게 동일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이 비록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회상되지만, 그때는 그렇게 느꼈다고 하는 어른들의 회상에서도 역시 그런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었다. 도저히 긍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에 공포로 길들여지고 정보의 제약으로 시야가 좁아지면, 누구나 그러한 의식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 세상이 무너지고 완전한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느끼며, 그러한 사태에 슬픔과 분노를 느낄 때, 사람들은 서로의 공감적 감각을 확인하고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연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터져 나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목소리가 ‘저항할 수 없는 저항’, ‘비폭력적 저항’의 형태로 나타날 때, 광장은 그러한 목소리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 같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통해 무도한 권력을 퇴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항의 정당성은 오로지 공공연하게 드러내기[demonstration]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광장에서 표출되는 저항의 감각은 분노로 빚어진다. 그 분노가 화약처럼 쌓일 때 상징적 인물의 죽음이나 상해는 거기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된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동지’의 죽음 혹은 그것을 대표하는 ‘유명인’의 죽음은 상징적이면서도 친밀한 유대감에 근거한 공동체 의식을 자극하는 것 같다.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혁명의 목소리는 그렇게 종종 ‘상징적인’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나온다.


극적 상징화


광장이 체제의 질서가 정지된 예외적인 공간이 되면서 갖게 되는 저항의 이미지와 상징은 체제의 폭력이 압도적이면 압도적일수록 더욱 극대화된다. 


광장의 저항은 체제의 폭력에 쉽게 짓밟혀왔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장의 피는 그것으로 인해 더 극적으로 상징화되고 강한 폭발력을 획득한다. 피의 양, 비극의 양상. 이를 바탕으로 ‘순전한 비폭력적 저항의 희생’에 대한 신화가 말해지게 된다. 분노로부터 이념까지의 거리는 이럴 경우 보통 사상(捨象)되고 만다.


강압과 총칼 앞에 나약한 육신으로 맞섰던 사람들의 마음은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는 민주주의’와 같은 하나의 이념적 행동으로 치환될 수 없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분노,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는, 나의 존엄을 더 이상 훼손할 수 없다는 몸부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웃 중국의 예이지만 ‘탱크맨’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대만에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상징화의 맥락에서 그는 이미 ‘죽음’을 맛보았다. 설사 대만에서 살아있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실명과 얼굴을 공개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결정되지 않은 채 부유하게 될 테니 말이다.


AP/Jeff Widener의 "Tank Man"



비식별적 상태


떳떳하고 정당하게 느껴지는 그 분노의 표출은 공식적 혹은 공공연한 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것 같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구현된 저항과 분노의 몸짓을 ‘민주화 운동’으로 ‘복권(復權)’시켜 놓긴 했지만, 그 지위는 늘 불안하다. 지난 정부의 일이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 국무총리 대리참석 등에서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듯이 당시의 ‘승인된 권력’, ‘체제의 권력’에 따라서 그 위상이 요동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판단 불능’에 빠지지는 않는다.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어떤 판단은 존재하지만 공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은폐되고 있을 뿐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론’이라는 형태로는 판단 불능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체제의 판단이 '정당한' 것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당함'에 대한 감각이 요동치게 되는 이유는 일방적 파괴의 폭력이 만들어 내는 게 상징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급부로 새로운 폭력을 불러온다. 거기에는 '정당한 폭력'을 결정하기 위한 판단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둘 모두를 거부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폭력의 대립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양비론’의 자리에서 자신의 선택을 유보하곤 한다.


저항하는 폭력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부당한 폭력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나더라도 그 폭력에 그저 ‘희생’되는 것만이 숭고한 것인가? 절대적으로 폭력이 배제될 때에만 저항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볼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러한 것들이 민주사회에서 숭고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기려지고 기념된다. 어떤 폭력도 정당성과는 연을 맺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체제 수호의 폭력'만을 정당화시키는 한계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수호'의 이름으로 '억압'과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 '부당함'을 누가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당방위’를 보면, 많은 경우 체제의 기준으로, 그리고 그보다는 적지만 어느 정도는 ‘다수’의 동의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준들이 고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떠올려보아도 '정당한 폭력'을 규정할 근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광장의 비식별성을 법철학적 의미에서 보면, 광장은 질서가 정지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순수한’ 혹은 ‘정당한’ 폭력이 투사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법의 정지는 확인된다. 그리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 질서의 절대적 주권자로서 다수 시민의 새로운 일체감이 비법적 행위를 빚어낸다는 점에서도 광장은 질서/법의 정지 공간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이 학교에 있지 않고 거리에 서서 경찰과 대치하며, 최고 권력자의 하야를 요구했던 4.19가 그랬고, 모두가 거리에 쏟아져 사회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던 87년 6.10이 그랬다. 도로가 막히고 도시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권력(미국을 포함해서)에 저항했던 2002년, 2004년, 그리고 2016-17년의 촛불이 그랬다. 그리고 구질서의 ‘정지’로 광장은 ‘새로운 질서’를 잉태시켰다. 그 결실이 어땠느냐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일체감, 분열, 열광과 공포, 그리고 희망의 기억들


이제 내게 있어서 광장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배움의 영역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A red sea in Seoul (사진출처: fifa.com)


2002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월드컵이 있었고, 2차 연평해전이 있었으며,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고, 촛불이 있었으며, 대선이 있었다. 그렇게 그 한 해 한국은 ‘예외상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광장은 그 전이적 상태의 분노, 불안, 희망이 교차했다.


전국적으로 거리응원에 나선 사람 수가 연인원 기준으로 1,300만(경찰 추산)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딘 가에서는 2,800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거기에 나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광장이 그렇게 들끓었을 때, 동시대를 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회상, 방송 뉴스, 기사 등을 접했다. 그래서 나도 그 때의 광장을 ‘잘 알고 있다’고 느낀다. 일체감에서는 덜하겠지만 말이다.


거리응원에 나선 사람의 수, 인해의 장관을 보도하는 뉴스들 사이로 거리응원의 군중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벌였던 문란한 행동들도 심심치 않게 기사화 되었다. 선정적인 ‘섹스 세리머니’가 그 이후 월드컵 거리응원에서도 많이 기사화 되었다. 2006년 월드컵 때 나는 이 문제로 인터넷 상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질서가 사라진 듯한’ 그 느낌이 공동체적 일체감의 부수적 효과라는 주장, 즉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사진출처: penholic.egloos.com


2002년 두 여고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사람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켜게 되었고, 그해 대선의 판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도 할 말 하는 대통령’에 대한 염원이 분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부터 직접 광장에 참여했다. 미 대사관 앞에서 친한 선후배와 함께 촛불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04년 봄 탄핵 반대 시위로 광장을 다시 경험했다. 그리고 이내 이라크 파병 문제로 여의도 광장으로 나갔던 경험도 떠올려진다. 내게는 참여정부에 대한 기대가 확 꺾이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실리주의 감각이라는 걸 도통 알 수 없는 젊은 때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촛불시위 최대 인파 기록이 다시 쓰였다. 광우병의 공포는 이제 사라져 버렸지만 그때의 아우성은 단지 그런 공포에만 이끌린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비굴한 협상, 은폐, 그리고 식탁 안전 문제라는 점(아이들 문제)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때도 하루 이틀 정도는 광화문 광장에 나갔던 것 같다. ‘명박산성’이라는 상징물이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반값등록금 촛불시위가 있었고, 2008년 이후 큰 규모로는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 항의 촛불시위, 2014년 세월호 추모 촛불시위가 있었다. 2015년 11월의 민중총궐기는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문제가 되었었고, 백남기 어르신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연인원 천만의 촛불시위가 이루어졌다. 광우병 시위의 최대 인원 참여 기록이 쉽게 여러번 깨지고 말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 낸 함성이 국정농단의 책임이 있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바로 얼마 전에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냈다.


광장은 새로운 질서를 ‘정초’하는 공간으로 경험되었다. 


일체감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분열을 안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저 조금 작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미약한 소리가 광장에서는 계속 메아리친다. 외면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추모의 공간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적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국가의 일방적인 ‘폭력의 전시’가 민주화 이후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 광장은 모일 ‘이유’가 있는 시민들이 모여 공감하고 유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공감은 분노와 슬픔에서 그리고 과장된 자국우월주의에서 크게 증폭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새로운 현실 감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역시 예외상태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신화적 역사는 이런 감각 하에서 쓰인다. ‘나쁜 사람들’과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목적론적 역사관이 나타나며, 집단 트라우마의 치유가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데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의식이 만들어진다. 이는 진보나 보수로 구별되는 진영에서 공히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광장의 추모는 진보 세력의 전유물이 된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 고 백남기 어르신 분향소 등. 그 이전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광장에 추모 인파를 불러왔었다. 아직은 진영에 따른 ‘광장 추모’의 편차가 크지 않았던 시기에 김구, 여운형 선생들이 있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등도 ‘광장 추모’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인물들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 노제 (사진출처: 불교신문)


최근 광장의 추모는 노무현과 세월호로 정리 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호 1000일, 박근혜 즉각퇴진을 위한 11차 촛불집회' (사진출처: 한국일보)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을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죽음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산자의 부끄러움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이 정비가 되어 그에 대한 추모는 광장에서 봉하로 옮겨 갔지만 세월호의 죽음은 아직 완결되지 않고 있다.


그 죽음들이 ‘새로운 세상’, 그 그림이 제대로 올바르게 그려지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그것에 대한 열망을 키워준다. 사회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상징적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직은 그 변화가 더디지만 말이다.


노이즈 같은 소수자의 목소리


광화문 광장_by June


요즘 상대적으로 광장이 텅비었다. 그러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목소리는 계속 광장을 떠돌고 있다. 밀양 할매・할배들이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지와 밀양 송전탑 철거를 호소하기 위해 6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모였다.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다. 광장은 행인, 관광객들로 채워져 있었고, 세월호 텐트는 아직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보였다. 경찰도 서 있었다. 촛불‘혁명’ 기념물도 세워져 있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텅빈 광장에 남아 있다.


2017년 6월 13일 밀양송전탑반대위원회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기자회견_by June


쌍차 손배소 철회 요구 현수막_by June


피켓 시위를 외롭게 하고 있는 시민_by June


촛불시위 기념물과 경찰_by June


세월호 천막과 조선일보_by June


광장, 중심적 경계 공간


변경의 경계성과 광장의 경계성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수평적 구조와 수직적 구조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중심 상징’은 엘리아데가 많이 이야기했었다. 중심의 경계성을 이야기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미는 충분히 담겨있을 것 같기는 하다. 중심은 수직적으로 천상과 지상을 매개해 주는 것으로 그려지니 말이다.


변경의 경계가 생물학적 위험과 관계된다면, 중심의 경계는 사회적 위험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률적으로 딱 구분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중심은 항상 코스모스의 구축/변형에, 변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질서 수호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다. 물론 중심과 변경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이런 유형론적 구분은 현실에서 별 쓸모는 없을 것이다.


중심과 변경은 본질적으로 그래서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스러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성스러움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메커니즘 자체는 저 경계의 ‘구분’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에 서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 광장


블랙홀처럼 과거의 세상을 빨아들이고 가보지 못한, 도달할 수 없는 우주에 새로운 세상을 뿜어낸다.

인간 문화의 웜홀로서의 광장일까? 아마 항상 그런 기능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쉬운 게 아니니 말이다.


카우보이 비밥의 Astral Gate


확실히 광장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행하는 관문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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