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버스토리/공간과 장소

까페의 상념, 혹은 문화사_민순의


0.

나에게 까페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동굴 혹은 주점(酒店). 나의 지인들이 나를 떠올리며 쉽게 환기하는 공간은 오히려 이런 쪽일 것이다. 나는 동굴(나의 방)에서 삼칠일 동안 식음과 수면을 전폐하며 ‘집필 수행’하던 끝에 세상 전체를 관통하여 감각하는 신비 체험을 했고(석사논문 집필 당시의 일이다), 모든 노동과 유희의 끝에서 언제나 주점에 있었다(그것이 실제의 주점이든 방안에 틀어박혀 혼술을 즐기는 나만의 상상적 주점이든).


이런 나에게도 까페와 함께 떠오르는 일화(逸話)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세 가지. 하나, 오래전 학부생 시절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까페 안의 룸은 마치 장롱(벽장) 같은 구석이었다. 서너 사람이 엉덩이를 붙여 간신히 앉을 그 협소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우리는 맑스를 읽으며 혁명을 논했던 것 같다. 상자 같은 공간은 참여자들이 내뿜는 담배연기로 빽빽하여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둘,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쓴 곳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운영하는 까페였다.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20분을 달려 그곳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두 잔의 아메리카노와(한 잔은 무료 리필이다) 한 잔의 물 그리고 약 반 갑의 담배가 나와 함께 했다. 막판에는 하루에 18시간씩 꼬박 석 달 열흘을 앉아 있었고, 1800시간 동안 자판을 두드린 끝에 나의 박사논문은 글의 꼴을 갖추어 세상에 나왔다. 셋, 이건 비교적 최근의 일. 한 남성과의 감정적 교착과 오해의 중첩으로 사람 가득한 대형 까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일이다. 한가롭게 저마다의 망중한을 즐기던 이들에게 나의 고함 소리는 얼마나 난폭한 틈입이었을지. 부끄러움을 뻔뻔함으로 가려 본다. 그 남성과의 사정? 뻔한 결말이지 않겠나.


동굴 또는 주점이 어울리는 나의 성정 때문인지 몰라도 나에게 기억되는 까페의 경험은 이처럼 온통 뒤죽박죽이다. 다른 사람들은 까페를 어떻게 경험해왔을까? 쉽게 연상되듯이, 까페란 인류문화에서 여유와 대화의 공간, 혹은 소통과 창조의 자리이기만 했을까? 까페의 서사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

까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커피와 함께 한다. 정확히는 커피의 문명사. 까페(café)라는 이름부터가 커피(coffee)의 남부 유럽식 이칭(異稱)이자 그로부터 공간적 의미를 획득한 단어 아닌가. 시작은 아랍이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 지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커피를 처음 마신 곳―혹은 처음 마신 것으로 ‘세계문명사’에 기록된 곳―은 아라비아 남부 예멘의 모카(Mokha) 지방으로 전해진다. 15세기경 예멘의 이슬람 신비주의자와 종교가들은 커피의 각성적 효능을 충분히 인지하며 의도적으로 그것을 마셨던 것 같다. 오랜 명상과 기도에 커피의 카페인 성분은 최고의 효과를 가져다주었고, 알코올의 섭취를 엄히 금하는 아랍의 이슬람 문화 전통 속에서 커피는 수승한 음료로 간주되었다. 1511년에는 이슬람 최고 성지인 메카(Mecca)에서도 커피를 마신 기록이 확인된다. 메카를 방문한 순례자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 주요 아랍 도시들로 커피를 전파시켰다.


오스만 투르크의 예멘 지배는 커피의 문명사에 또 한 번의 특이점이 되었다. 예멘의 특산물로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진상된 커피는 투르크인들의 애호 속에서 세계 최초의 까페를 탄생시킨다. 1554년 이스탄불에서 문을 연 카흐베하네(kahvehane) ‘카네스(Kanes)’가 바로 그것이다. ‘카흐베하네’란 글자 그대로 ‘커피 집’ 즉 커피하우스라는 뜻이다. 제국 최고의 전성기를 겪으며 활력에 넘치던 16세기의 이스탄불에서는 이내 600개가 넘는 까페 즉 카흐베하네가 세워졌고, 그에 따라 화려한 까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말과 행동이 오가는 법. 제국의 까페들은 이내 오락과 노래와 춤, 그리고 지식인들의 잡담으로 채워졌고, 차츰 단순한 사교 공간을 넘어 정치 토론의 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제국의 통치자들은 한때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나. 그러나 투르크인들의 커피와 까페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Where coffee is served there is grace and splendor 

and friendship and happiness.

커피가 나오는 자리에는 우아함과 화려함,

그리고 우호적인 분위기와 행복이 있다.

- Shaykh Abd Al-Qādir, 1587.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파견된 유럽의 외교관들은 이스탄불의 이국적인 문화에 적응하며 매일 밤 커피를 마셨고, 제국 당국의 커피 유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외교행랑을 이용해 커피 원두를 본국으로 빼돌렸다. 그 결과 유럽 본지인들도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


2.

1645년 베니스에서 유럽 최초의 까페 ‘보테가 델 까페(Bottega del caffè)’가 개점한다. 이는 이태리어로 ‘커피가게’란 뜻이다. 1652년 런던에 ‘파스카 로제(Pasqua Rosée)’라는 이름의 커피하우스가 세워지고, 이후 30여년 만에 런던에만 3,000개 이상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1670년대에 최초의 까페 ‘르 프로코프(Le Procope)’가 들어서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커피하우스란 말을 까페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1685년에는 비엔나에도 까페가 입점하였고, 1720년에는 다시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아케이드 밑에 오늘날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이 개장하였다. 나폴레옹, 괴테, 니체, 스탕달, 바이런, 릴케, 디킨스, 모네, 마네와 같은 인사들이 플로리안의 고객이었다.


이태리의 까페는 계급이나 재산 정도에 상관없이 커피 한 잔 값으로 하루 온종일을 지낼 수 있는 평등한 공간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비엔나의 까페는 전통적 선술집과 달리 중산층에게 보다 안락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점차 유럽의 까페는 정치와 사교, 예술과 문학의 거점이 되어갔으며, 프랑스 파리의 르 프로코프에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1789년 7월 13일에는 파리의 ‘까페 드 포이(Cafe de Foy)’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할 계획이 세워지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이 발화되었다. 또 오스트리아학파나 시카고학파와 같은 유명한 경제학파들도 까페에서 모임을 갖곤 했으므로, 까페는 다양한 지식이 활발히 교류된다는 의미에서 ‘1페니짜리 대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랍의 까페에서는 계몽주의와 근대화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정치적 토론이 어째서 서구의 까페에서는 가능하였던가.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17세기 유럽의 시민사회는 자유의 맛과 함께 커피의 맛을 즐겼으며, 까페에 드나들면서 사람들은 더욱 자유를 누렸다. 담론과 사교의 사랑방인 까페는 일상성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까페문화는 자유롭게 열린 근대적인 도시의 문화 현상이며, 그 밑바닥에는 유럽 문화의 주요 특징인 담론과 사교의 풍토가 깔려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손연숙 2016: 3쪽).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투르크 제국의 까페라고 자유로운 담론과 열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두 문화의 역사적 귀결에는 보다 복잡한 사회정치적 요인들이 있었을 터. 하지만 그 요인들의 여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 도시문화의 어떤 측면을 유럽의 까페들이 수렴하고 추동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까페의 문화는 근대기 한국사회에도 어김없이 이식되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까페는 1902년 고종의 후원으로 독일계 러시아인 여성 손탁(A. Sontag, 1854~1925)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 1층에 위치한 ‘정동구락부’이다. 구락부(俱樂部)란 클럽(club)의 일본식 음차어이다. 고종이 당시로서는 유난스러운 커피 매니아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여파로 1896년 2월부터 황태자(훗날의 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된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aeber, 1841~1910)를 통해 처음으로 커피를 접하였다. 이 시기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었던 사람이 바로 손탁으로, 이 때의 인연에 힘입어 수 년 뒤 손탁 호텔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서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보다 대중적인 까페는 1909년 남대문역에 문을 연 ‘남대문역끽다점’을 효시로 삼을 수 있다. ‘끽다(喫茶)’란 차를 마신다는 뜻으로서, 한자문화권에서 특히 차문화가 발달한 불교계를 중심으로 흔하게 쓰이던 서술어이다. 일본에서는 근대 초기부터 찻집이라는 뜻으로 ‘끽다점(喫茶店, きっさてん)’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였고, 남대문역의 까페는 바로 그 일본산 용어를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것이었다. 1909년 11월 3일자 《황성신문》에는 “茶座開設 南大門停車場에 一日붓터 喫茶店을 開設얏다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그 첫 등장의 시기를 분명히 알려 준다. 뿐만 아니라 1915년 조선 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된 『조선철도여행안내(朝鮮鐵道旅行案內)』 책자는 「남대문역끽다점내부(南大門驛喫茶店內部)」라는 글과 함께 해당 점포의 사진을 아래와 같이 게재하여, 그 모습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朝鮮鐵道旅行案內』 「南大門驛喫茶店內部」 게재 사진

   

4.

남대문역끽다점 역시 일본인 소유 또는 총독부 직영의 점포였고,(『조선철도여행안내』에 의하면 이전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가 “1913년 4월부터 물품을 남대문역끽다점에 납입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부터 총독부에 의한 직영이 시작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까페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 1904~1978)이 종로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이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영화배우 복혜숙(卜惠淑, 1904~1982)이 종로2가에 ‘비너스’라는 까페를 열었으며, 뒤이어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1905~1974)과 조각가 이순석(李順石, 1905~1986) 그리고 시인 겸 소설가인 이상(李箱, 1910~1937)도 경성(京城) 시내에 각각 ‘브라다나스’, ‘낙랑팔러’, ‘제비’라는 이름의 까페를 차렸다. 이처럼 초창기 까페는 주로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명동, 종로, 소공동, 충무로 일대에는 문화예술인들이 경영하는 까페가 수십 곳이나 존재했다. 당시 까페는 문화예술계의 소통의 장이었고, 작가협회의 사무실 역할을 하였다.


이 즈음 한국의 까페는 ‘다방(茶房)’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오늘날 우리의 어린 기억에 아련히 남아 있는 바로 그 다방 말이다. 상호에 다방이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1929년 종로2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 근처에 배우 김용규(金龍圭)와 심영(沈影, 1910~1971)이 개업한 ‘멕시코다방’이다. 까페(café)의 선행 호칭이 카흐베하네(kahvehane) 또는 커피하우스(coffee house)이듯이, 커피를 마시는 집/방이라는 의미로 다방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방이라는 말은 이미 『고려사』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내시(內侍,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남성 관료인 환관(宦官)과는 달리 귀족의 자제들에게 맡겨진 임금의 최측근 보위직(保衛職)이다.)와 더불어 왕을 근시(近侍)하거나 궁궐을 지키는 관원을 가리켰다. 


성중관(成衆官)을 선발하고 보임[選補]하는 법.

○ (성중관이란) 내시원(內侍院), 다방(茶房), 사순(司楯), 사의(司衣), 사이(司彝)를 말하는데, 그것을 처음 설치한 시기는 상고할 수 없다.

○ 공양왕 2년(1390) 10월에 이조에서 계문(啓聞)하기를, “내시와 다방은 궁궐 안에 드나들기 때문에 그 임무가 가벼운 것이 아닌데, … 바라옵건대 태도와 용모가 단정한 자 100명을 골라서 충당…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 『高麗史』 권75, 「志」 권제29, ‘選擧 3 銓注’


전통시대의 관료인 다방은 주로 궁중에서 필요한 약을 조제하여 바치거나 다례(茶禮)에 해당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차(茶)를 공급했고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였다. 그 밖에 꽃, 과일, 술, 약 등의 공급과 관리도 다방의 임무였다. 바로 이 ‘다방’이라는 단어가 한국의 근대 공간에서 전통적 용례의 맥락이 소거된 채 서양식 까페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5.

일제시대라고 해서 어디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독립투사이기만 했으랴. 조선인의 모든 삶이 억압과 고문으로 얼룩진 야만의 상처이기만 했으랴. 짐작컨대 당시 조선인민 대중의 삶은 대한민국 70~80년대의 군사독재 시절보다 못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 일각에서는, 특히 경성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비록 외세의 영향이기는 하나, 근대성/모더니티의 세례를 받으며 세계와 미래를 향한 어렴풋한 비전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이 소설 『날개』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쳤던 장소인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도 사실은 당시 카페테리아가 만들어져 각종 연회가 열리던 곳이었다고 한다(우정권 2010: 344~345).


대도시의 까페 안에서 사람들이 누렸던 일상은 1930년대의 대중문화와 시대분위기를 주도하였다. 까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서구의 풍요로움과 모던한 세련미의 표상이었으며, 커피와 함께 까페에서 취급하던 포도주, 위스키, 맥주는 사람들을 서구문화에 취하게 하여 마치 자신들이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도 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했다. 또한 까페에서는 연일 축음기로부터 재즈음악이 흘러나왔고, 당국이 ‘경성에 댄스홀을 금하라’고 할 만큼 전사회적인 춤바람이 일었다. 춤사위에 몸을 실은 조선의 중산층 대중은 서구의 모델을 흉내 내거나 영화 속 배우의 패션을 따라 입으며 모더니티를 체화하고자 하였다(우정권 2010: 359~365).


그러나 까페로 표상되던 근대 조선의 모더니티는 소비로 점철된 깊은 우울의 탄식임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성과 환락적 유흥문화의 속성을 배태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경제적 문화적 층위의 최하위를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빈곤 계층의 젊은 여성이었다. 결국 경성의 까페들에서는 여급과 관련된 각종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기까지 한다.


문제는 당시 까페 여급들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가 단순히 경제력의 취약성으로부터 야기되는 섹슈얼리티 착취의 측면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은 모더니티의 세례 속에서 개인주의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지닌 근대적 주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식민지 카페는 … 당대 사회가 열어놓은 자유연애의 욕망이 교차하고 있다. … 직업적 서비스와 자발적 유희 행위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여급 역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발현하고 연애의 욕망을 실현하는 유희적 주체로 자리하기도 한다. … 여급들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활용되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넘어서 카페 안의 유희와 욕망이 지니는 또 다른 층위의 의미망을 열어놓는다”(서지영 2003: 38). 


한편 《동아일보》 1932년 7월 19일 기사에는 ‘아리랑 살롱’의 여급 30명이 까페 지배인의 횡포에 맞서 동맹 파업을 일으킨 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당시 경성에서는 많은 노동쟁의들이 발생하였는데, 까페 여급들이 결속하여 파업을 벌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사건 역시 1930년대 조선의 까페 문화 이면에 엄연한 자본주의적 속성과 함께, 당시 모던 보이 또는 모던 걸로 대변되던 근대적 주체의 사회경제적 진취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6.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국사회의 까페/다방 문화에 대해 내가 직접 상고할 길은 없다. 그 당시 서민 대중 생활의 분위기를 나에게 전해줄 수 있었던 분은 이태 전에 이미 타계하셨다. (아버님,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든 부디 평안하소서!)


다만 하나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으니, 바로 ‘학림다방(學林茶房)’이다. 서울 혜화동 대학로 소재. 1956년 개업. 개업 당시 맞은편에 서울대학교 문리과가 있었으며,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이청준(李淸俊, 1939~2008), 김지하(金芝河, 1941~ ) 등 한국 문단사(文壇史)의 거인들을 비롯한 동시대의 학생들이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아지트로 삼아 활동한 덕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의 까페 문화를 주도했던 문화예술인의 적극적 활동성에 비할 바는 아니나, 오히려 학생의 신분으로 문학과 역사와 시대를 이야기했을 그 담백한 모습들이 선연하다.


학림다방의 분위기는 1981년에 일어난 학림사건(學林事件)으로까지 연결된다. 학림사건은 1981년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학생운동단체 중 일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처벌한 사건인데, 당시 대학생 연합 단체인 ‘전국민주학생연맹’(이하 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진 곳이 대학로의 학림다방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전민학련 간부들은 강제 연행되어, 불법 구금, 변호인 및 가족의 접견 차단, 물고문과 전기고문, 강간 위협 등 각종 비인간적 횡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법정에서 폭로되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으며, 1982년에 최종 확정 판결되었다.


서울대가 대학로 마로니에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시기에서 한참 뒤의 세대인 나에게 학림다방은 선배들의 낮은 수군거림을 통해 눈보다는 귀로 몸보다도 마음으로 접해진 공간이다. 모두(冒頭)에서 밝힌 학부 시절 장롱 같던 까페 룸의 기억은 그 맨 끝자락의 흔적이리라. 세대를 넘도록 대학가의 카페를 감싸고돌던 거칠고 질긴 저항의 에토스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4.19에 5.18에 그리고 87년 6월의 항쟁 속에, 그렇게 대한민국 민주주의사의 주요한 고비마다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마로니에의 학림다방에서, 관악 녹두거리의 허다한 지하 까페에서, 열띤 토론으로 혁명과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던 그 시절의 시대정신은 오래 전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서구 까페 문화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또한 믿는다(그러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 그 또한 심연이 된다고 했던가. 파쇼를 미워하다 파쇼를 닮아버린, 낡은 집단주의와 위계질서의 틀에 갇혀 자유로운 후배의 영혼을 질식시켰던 80년대 학번 선배들에게 심심한 유감과 위로의 건배를!).

 

7.

물론 한국 현대사에서 까페/다방의 이미지가 그처럼 ‘정의로움’만으로 착색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는 까페 이전에 다방이 있었다. 그것은 개발독재가 주도하는 산업사회―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채 내면의 전근대성을 모른 체하는 가짜 근대성 혹은 유사 근대성으로서의 산업사회―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하 또는 키 낮은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넓은 홀. 한가운데에는 형광등을 발사하는 직육면체의 대형 어항이 있다. 플라스틱 수초의 견딜 수 없는 키치(kitsch)스러움 사이로 잉어만한 금붕어가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그리고 ‘때릉’ 하는 문소리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주인이 인사로 맞이하면, 역시나 고운 옷차림의 레지 아가씨가 메뉴판을 들고 와 주문을 받는다. ‘레지’가 금전출납기록원을 뜻하는 영어 ‘레지스터(register)’의 축약어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여하튼. 실내에는 흰색 테이블보를 뒤집어 쓴 낮은 테이블과 등받이를 흰색 천으로 덧씌운 의자들이 빼꼭하며, 테이블마다 기계 커팅이 현란한 유리 재질의 커다란 재떨이가 놓여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미상불 커피 한 술, 프림 두 술, 설탕 세 술의 크림커피, 아니면 달걀노른자를 생으로 넣은 쌍화탕일 것이다. 이것이 60~70년대 지방 중소도시 또는 농촌지역 읍내의 다방 이미지이다. 대도시로 상상의 층위를 올려붙여도 기본적인 이미지의 골격은 변하지 않는다. 서울의 큰 다방에는 최신의 메뉴로 크림커피에 달걀노른자를 생으로 넣은 모닝커피가 있고, 또 음악 디제이가 있더라는 것이 내 어머니의 증언.(처녀 시절 딱 한 번 서울 사는 친구를 따라 다방에 들어가 봤던 얌전한 수원아가씨의 유일한 인상이다.)


디제이 다방이라 하니 70년대 대학가를 강타했던 통기타 가요와 생음악 다방들이 연상된다. 학림다방까지는 아니어도 이것들 또한 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암울한 젊은 영혼들을 어루만졌던 나름 해방의 공간이었을 터. 하지만 학림다방처럼 통기타의 생음악 다방들 또한 그 시절의 주류는 아니었다.


다방 레지들은 쟁반에 커피포트와 찻잔을 올려 보자기로 동여맨 채 인근의 사무실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사무실마다 넘쳐났던 자본의 증거. 일회용 믹스커피는 1976년에야 출시되었으니 다방 아닌 곳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일일이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섞어 타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했겠으나, 그 당시 남성들은 손이 없었나. 있는 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남성들은 사무실의 여성들에게 커피 시중을 들게 했다고 하더라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건가. 실내 흡연처럼 낯설기만 한 수십 년 전의 터무니없이 낮은 젠더감수성.


70년대는 개발 광풍의 시대였다. 강남을 위주로 한 서울 외곽 황량한 시골의 들과 밭에 수많은 ‘떴다방’들이 말 그대로 떴다 지고, 수 세대 동안 땅을 일구며 살아왔던 토착민들은 외부에서 유입된 자본에 내몰려 타지로 쫓겨 갔으며, 레지 아가씨들은 쉴 틈도 없이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커피를 공수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매매춘에 얽히기도 했다던가. 그 하위문화는 또 얼마 전까지 ‘티켓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던가. 이렇게 60~70년대 한국사회의 다방문화는 성숙하지 못한 정신세계 위에서 넘쳐나는 자본을 타고 흐르며, 낮은 인권의식과 그보다 더 낮은 젠더의식의 시대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8.

80년대 들어 한국경제는 비약한다. 그 토대는 70년대에 구축되었다. 80년대는 그에 대한 향유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대중의 눈높이는 세계적 기준을 지향하고, 89년도의 과외학습 해금은 한국경제의 호황과 맞물려 대학가에 여윳돈이 넘쳐나게 했다. 변화의 바람은 ‘커피숍’ 혹은 ‘까페’에도 불었다. 이제는 아무도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그 공간을 부르지 않았다. 외부 간판은 강렬한 채색과 네온으로 화려해지고, 실내의 인테리어 기술도 비약했다.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배치가 추구되었고,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였다. (아직 휴대폰은 상상 못할 시절이었다.) 많은 까페들이 커피와 음료 외에 파르페와 아이스크림을 팔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한 경양식을 취급하기도 했다.


90년대가 되고, 시절은 더 좋아졌다. 삐삐라고 부르는 호출기가 상용화되고, 커피숍 테이블의 개별 전화기는 필수품이 되었다. 비록 3당 야합으로 탄생한 정권이긴 하나 내 생애 처음으로 군인이 아닌 이가 대통령이 되었고(최규하 씨는 논외로 하자), 한국의 재벌들에게는 지구촌이 좁아보이게 되었다.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등의 양태는 다채로웠고, 대중문화는 자본이 주도하는 감각적 이미지로 흘러넘쳤고, 화려한 광고들이 시선을 빼앗았다. 외부세계와의 직접적 접촉을 방해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경계하라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일갈은 아직 한국 땅에 닿지 않았다. 문명사회 전 방위를 넘실대는 작금의 해체적 사조(포스트모더니즘)가 어쩌면 자본의 농간일지 모른다던 철학과 교수님의 우려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진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향후 최소 500년은 무궁한 번영을 지속할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까페에 둘러 앉아 노닥거렸다. 시간과 돈과 가능성은 우리 것이었다. 우리는 젊었고, 까페는 대화와 소통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향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IMF가 왔다(1997년).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형 까페가 국내에 상륙했다. 잘 볶은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보석 같은 작은 까페들에서 커피를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아는 사람 셋 중 하나는 바리스타 되기를 꿈꾸던 때였다.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까페의 확산. 조금씩 늘어나던 대형 까페들은 어느 새인가 한 블록에 서너 개씩 들어찰 정도가 되었다. 작은 까페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이제는 대형 프랜차이즈 까페에 앉아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맛도 모른 채 생각 없이 마신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 되리라 예상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9.

최근의 까페는 대화와 소통의 공간으로만 묘사하기 어렵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넓은 매장은 대개 노트북 하나씩을 펼쳐든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들은 동행도 없이 2인석 또는 4인석을 차지하고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자판을 두드리며 커피를 마시다가, 까페에서 취급하는 간단한 그러나 몹시 값비싼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고, 스마트폰을 갖고 휴식을 취하거나 테이블에 엎드려 쪽잠을 청한다. 이상하지 않다. 비록 공간을 향유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다를지라도 나도 그들 중 하나일 테니까. 동굴(내 방)에서도 상상적 주점을 구축하고, 여럿이 함께 하는 주점에서도 팔짱 끼고 웅크려 앉아 사람들을 조근조근 관찰하곤 하는 나의 성정에, 최근 까페의 그 같은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 경향은 오히려 편안하다.


물론 여전히 까페는 대화와 소통의 공간이다. 셋 중 하나 또는 다섯 중 두 좌석에는 여전히 일행을 이룬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일행들 중 일부가 마치 혼자서 온 것인 양 각자의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진풍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페 혼공족’(까페에서 혼자 공부하거나 일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왠지 차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까페 주인으로부터, 소통의 공간으로 까페를 찾은 전통적인 대화족(對話族)으로부터, 그리고 사회의 암묵적인 상식과 규범(이라는 꼰대스러움)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온/오프라인에서 까페 혼공족에 대한 불편함을 비난 섞인 어조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까페 혼공족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은 점점 순해지고, 세간의 인식 또한 많이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들어가 본 대형 까페는 한 층 전체가 아예 도서관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나쁘지 않다. 그저 세태일 뿐이다.


이 같은 까페의 세태는 비단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닌 듯하다.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도 매일 오전 8시에 같은 까페를 찾아 같은 자리에 앉아 규칙적으로 집필 작업을 한다고 이야기를 보면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같은 세태를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주의(遊牧主義)로 표현한다. 정주(定住)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일’을 할 공간으로 카페를 선택하는 이유는 공공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성격이 혼재하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미묘한 긴장과 편안함의 혼성적 느낌 때문이다. … 이른바 ‘경계(문턱) 공간(liminal space)’이 갖고 있는 혼성성이 이들을 카페로 이끄는 요인이다. … 그것은 또한 익명성을 보장해주기도 한다.”(이수안 2011: 58~60).


예리한 해석이다. 익명성에 안주하여 흔들리고 움직이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21세기 도시인의 품성이 저 ‘유목주의’와 ‘경계의 공간이 갖는 혼성성’이라는 말 속에서 포착된다. 다만, 우리는 까페 혼공의 세태로부터 이른바 현대성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위에서 최근의 커피산업과 프랜차이즈 까페의 과도한 성장이 자본의 힘과 의지에 의해 주도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숙찰이 없이 소비 지향의 생활만을 반복한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에 미래는 없다. 자의식을 갖고 자신과 동료 시민들(citizen)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다면, 저항할 새도 없이 자본의 숙주로 영락하고 말 것이다.


최근 까페의 사사화 경향은 나무랄 일도 상찬(賞讚)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같은 개개인의 행동이 온전히 개인의 의사결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혹시 그것이 차마 피치 못한 사회적 현상 또는 안이하고 해태한 지성의 결과라면, 그런 현상을 자각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개인들의 연대와 집단지성을 통해 거대 구조에 대한 인식과 그 대안의 모색을 시도하는 것도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

사족 하나. 나에게는 한 친우(親友)가 있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늘 어제 본 것처럼 스스럼이 없다. 또 한 차례 닥쳐온 인간관계의 장렬한 죽음에 며칠을 잠 못 이루다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예고도 없이 그를 찾는다. 그의 집 앞에 보석 같이 남아 있는 작은 까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는 아무 말 없이 만면에 미소를 띠운다. 그 미소에 힘입어 나는 죽어버린 관계를 담담히 애도하고 평온을 되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한다. 말 없는 소통. 침묵 속의 교감. 새로운 역의 합일. 까페와 관련한 나의 이력에 새로운 기억이 하나 추가되었다.



■ 참고문헌


『高麗史』 권75, 「志」 권제29, ‘選擧 3 銓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방’ 항목.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서지영, 「식민지 시대 카페 여급 연구 -여급 잡지 『女聲』을 중심으로- 」, 『한국여성학』 19(3), 한국여성학회, 2003.

손연숙, 「카페문화의 역사와 음다공간의 정체성 부합에 관한 연구」, 『차문화‧산업학』 32, 국제차문화학회, 2016.

우정권, 「1930년대 경성 카페 문화의 스토리 맵에 관한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32, 한국현대문학회, 2010.

이수안, 「혼종공간으로서 카페와 유목민의 문화풍경」, 『문화와 사회』 10, 한국문화사회학회, 2011.

이희수, 『세상을 바꾼 이슬람』, 다른, 2015.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7.


《동아일보》, “아리랑 女給 三十名 盟罷”, 1932.7.19.

《황성신문》, “茶座開設”, 1909.11.3.


서울특별시 인터넷 개설 페이지, “서울재발견: 서울스토리”, ‘경성 카페의 중심, 살롱 아리랑 - 공간’.

인터넷 매거진 “커피여정”, ‘수도사를 닮은 커피: 이탈리아 베네치아, 유럽 카페의 탄생’.

인터넷 블로그 “원이워니’s 커피로 그리는 세상 이야기”, ‘[커피역사] 커피하우스’.

인터넷 카페 “T.F.C Internatioale”, ‘영국 커피하우스의 역사’.

인터넷 카페 “드림커피”, ‘커피의 역사 3 ..... 한국에 전래된 커피’.

인터넷 카페 “배낭길잡이: 유럽여행과 까페여행”, ‘비엔나 커피하우스’.

인터넷 카페 “칵테일 캠퍼스”, ‘우리나라의 커피문화’.

WALTZ & DR.MAHN 인터넷 홈페이지, ‘[한국 커피의 역사] 한국 최초의 다방, 남대문 역 기사텐’.

'커버스토리 > 공간과 장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양'이 비추는 것은?  (0) 2017.12.04
광장, 중심이라는 경계_심형준  (0) 2017.06.30